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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들렌 Sep 19. 2023

우린 멀어져야만 해

 멀어질수록 좋은 관계가 있다. 나에겐 ‘가족’이 그렇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과 ‘가족’이라는 이름 안에 하나로 묶여 20년 넘게 서로를 견디며 사는 것만큼 괴로운 일이 또 있었던가. 굳이 알고 싶지 않은 각자의 치부까지 낱낱이 아는 사이. 상처 냈던 자리를 반복해서 후벼 파는 데에도 거리낌 없는 관계. 내게 가족이란 그런 존재다. ‘화목한’과 ‘가족’이란 단어가 나란히 놓일 때, 이질감을 느낀다. ‘화목한 가족’으로 보이길 기대하는 사회의 시선이 나는 아주 많이 불편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목숨 걸어 쌍둥이 언니들을 낳고(쌍둥이 언니들을 낳았을 때 엄마의 몸엔 삼분의 일만큼의 피가 부족했다고 한다.) 또 연년생으로 나까지 낳은 당신은 대체 왜 우리를 낳았을까. 실컷 사랑해 주지도 않을 거면서. 세 아이를 낳고 당신이 얻은 건 무엇이었길래. 망가진 몸과 흉터, 산후우울증? 물론 얼마간의 행복도 있었겠으나 내가 들어온, 곁에서 지켜본 엄마의 삶은 대체로 고달프고, 위태로워 보였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엄마는 (젖먹이 세 아이를 두고도 적극적으로 일자리를 구하지 않는 남편 때문에)항상 뭔가를 배우는 동시에 자격증을 따느라 바빴고, 날 서 있었으며, 그래서 자식들에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집 안’에서나 ‘집 밖’에서나 가장의 임무를 수행해야 했던 사람. 그러느라 마음에 여유가 부족했던 사람. 때문에 늘 화가 정수리 끝에서 찰랑거렸던, 그 화가 언제 흘러넘칠지 몰라 항상 우리를 긴장케 했던 사람. 어린 우리들이 우는소리를 내서, 말을 듣지 않아서, 당신의 몸은 한 갠데 세 개의 작은 몸들이 당신의 관심을 끝도 없이 원해서 등등 엄마가 우리에게 윽박지를 이유는 차고 넘쳤다. 그녀의 화는 쉽게 폭력이 되었다가 곧잘 협박으로 변하기도 했다. 그냥 다 같이 죽자는 협박. 그 협박이 진심이란 걸 언니들과 나는 모르지 않았다. 아무리 어려도 목숨에 위협을 느끼는 순간을 알아채는 건 동물이 가진 본능이니까.


 언제부턴가 나는 기억하는 일에 집착했다. 특히 유년 시절에 겪은 아픈 기억들. 내가 기억하지 않으면 누구도 알아주지 않으니까, 다들 너무나도 쉽게 잊어버리니까. 심지어 어떤 기억은 아예 없었던 일이 되기도 한다. 그게 억울해서 수시로 과거를 회상하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경험한 일이 결코 없었던 일이 될 순 없다는 억울함. 오늘날의 내가 ‘기록 강박’을 갖게 된 사연이나 엄마와의 좋지 않은 일을 더 구체적으로 기억하게 된 사연도 같은 경험에서 파생된 심리적 욕구일 테다.

 애쓰지 않아도 이따금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이제는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되어버린 무수한 편린들. 20층 아파트의 창문 난간 너머로 위태롭게 목을 졸리고 있는 작은 언니의 새빨간 얼굴. 심장이 터질 만큼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차 안에서 굳은 얼굴로 운전대를 잡은 엄마와 긴장으로 뻣뻣해진 우리들의 몸. 발가벗겨진 채 집 밖으로 쫓겨난 추운 몸들. 머리채 잡힌 채로 거리에서 끌려다녔던 기억과 어디로 날아들지 알 수 없어 더 공포스러웠던 당신의 발길질. 

 수백 번도 넘게 곱씹고 내 나름대로 재해석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각각의 기억은 더이상 내게 아픔이 되지 못하지만, 그래도 내 마음이 쓰라린 이유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 공포 속에서도 우리가 당신과의 시간을 언제나 갈구했다는 사실. 외할머니의 보살핌만으론 채울 수 없던 당신의 사랑. 그 사랑에 내내 목말랐던 시절이 함께 떠오르기 때문이다. 벼랑 끝에 내몰려 사는 게 벅차고 의지할 곳 없어 매 순간 죽고 싶었을 당신을, 그때의 폭력은 어떻게든 살아보려던 당신의 발버둥이었음을 이제는 이해하지만, 그 사정을 알 길 없던 나는 얼마나 오랜 시간 당신을 증오해왔던가.


 그래서일까. 조금 더 자란 후의 나는 줄곧 엄마에게 비수를 꽂는 딸이었다. 받은 만큼 돌려주겠다는 심보로, 악착같이 그의 마음을 매일 아프게 찔렀다. 십 대 후반엔 하루라도 다투지 않고 넘어가는 날이 없었는데 집 안에서 우리 모녀의 고성과 한숨은 마를 날이 없었다. 서슴없이 가출도 행할 만큼 대범해진 20대 초반의 시절, 엄마라는 존재는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걸 깨닫자 내 말투는 온통 통보식인 데다 까칠해졌다. 

 가장 사이가 나빴던 시기는 대학생 때 자취하던 날들이었다. 당신의 돈은 축내되, 얼굴은 한 번도 내비치지 않고 대화조차도 거부했던 1년 반 동안의 시간. 그때 일과 관계 속에서 망가져가는 엄마의 몸과 마음을 보고도 무심했던 나를 기억한다. 당신에게 낸 상처에 친절하게 소금까지 뿌렸던 나의 악랄함도. 어쩌면 우리는 그때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걸까. 그래서 끝장을 봐야 했던 걸까. 어쨌든 엄마에게 상처 주는 것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폭풍 같은 시기를 겪고 내가 독립한 뒤 안정기(?)로 접어든 지금. 우리 모녀의 관계는 어렸을 때의 나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방향으로 변했다. 내가 무얼 먹고 사는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나의 하루하루를 가장 궁금해하는 사람. 엄마는 나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고 나와 이야기 나누고 싶어 한다. 반대로 나는 그런 엄마의 열렬한 사랑 고백이 귀찮다. 

 비극은 여기에 있다. 언제나 엄마의 관심과 사랑이 고팠던 아이는 더 이상 당신의 사랑을 딱히 원하지 않는 성인이 되었다는 사실과, 자식에게 사랑을 줄 여력이 드디어 당신에게도 생겼으나 그 사랑을 받아 줄 나는 이제 그곳에 없다는 사실.

 누군가의 사랑을 구걸하지 않고도 혼자 살아가는 법을 간신히 터득한 나에게 못다 준 사랑을 주겠다며 너무 늦게 손 내민 엄마가 원망스러웠던 적도 있다. 지금은 엄마가 내게 쏟는 관심이 부담스러울 뿐이다. 너무 밀착된 삶을 살았을 때, 우리가 서로를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수긍한다. 당신과 가까워지고 싶지 않은 이 마음을. 카톡으로만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는 요즘. 막내딸의 지나친 거리 두기에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던 엄마도 이젠 인정한 걸까? ‘우리’는 멀어져야만 좋은 관계가 될 수 있다는 걸.


“나는 엄마를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제발 나랑은 상관없이 혼자 알아서 행복해줬으면 좋겠으니까…. 나는 엄마가 아주 많이 불편하다.” <디어마이프렌즈>, 2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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