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살 터울인 쌍둥이 언니들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가부장제의 영향에서 지금보다 훨씬 더 자유로울 수 없었던 시절. 남들 앞에 서는 주눅 들기가 부지기수였던 유년기의 나는 또래 친구들을 사귀는 것보다 한 집에 사는 언니들과 있어야 마음이 놓이는 아이였다. 세상의 모든 것이 두려웠던 내게 기댈 곳이란 외할머니 아니면 자매들뿐이라는 믿음으로 살았던 그때. 그러니까 나에게 쌍둥이 언니들은 ‘은신처’이자 또 다른 ‘나’였다.
5인 식구가 20~30평대 아파트를 전전하며 살아가는 동안 세 자매에게 ‘자기만의 방’이란 닿지도 않고, 닿을 수도 없는 유니콘 같은 꿈의 공간이었다. 한방에서 세 자매가 지내기 위해선 일렬로 나란히 놓인 독서실 책상과 이층 침대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는데, 책상은 작더라도 각자의 것이 있었기에 싸울 일이 잘 없었지만 침대 쟁탈전은 피할 길이 없었다. 퀸 사이즈인 일층 침대와 싱글사이즈인 이층 침대 사이에서 우린 매일같이 아웅다웅했다. 혼자 자고 싶어서 설왕설래하고 있는 쪽에 언니들이 있다면 나는 일층 침대에 얌전히 누워 말싸움에서나 가위바위보에서 진 사람을 기다리는 쪽이었다. 세상 제일가는 겁쟁이였던 나는 저렇게 혼자 자겠다고 열을 내는 그들이 신기했다. 지겹도록 따라다니는 나와 잘 때까지 붙어 자야 한다는 사실이 자매들에겐 지긋지긋한 일이었을까?
걸음마를 겨우 뗀 순간부터 10대 초반까지, 나는 안에서나 밖에서나 ‘언니(들) 바라기’였다. 자매들이 아무리 귀찮아해도 아랑곳 않던 나. 외출할 때마다 동생을 서로에게 떠넘기느라 입씨름을 벌이는 언니들 옆에서 ‘오늘은 누가 나를 데리고 다닐래~’ 하고 실실거렸던 내 모습이 자매들 눈엔 얼마나 얄미워 보였을지. 고학년이 되어서도 언니들의 뒤꽁무니만 쫓는 나를 향해 ‘넌 친구도 없냐’며 조롱했던 언니 친구들의 말은 (그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이었으므로)여전히 상처로 남아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꿋꿋이, 더 보란 듯이 그들을 따라다녔다. 나와 꼭 닮은 그들을 번갈아가며 쫓아다니는 동안에는 세상을 생각하지 않아도 됐으니까. 나를 미워하는 어른들도 모두 잊을 수 있었으니까. 그런 순간에만 나는 나일 수 있었고 그게 퍽 좋았다.
나의 집요함 덕분에 우리 세 자매에겐 떠올리면 아련해지는 추억이랄 게 제법 많이 쌓였다.(고 스스로 자부한다.) 방과 후 해가 다 지도록 함께 콩콩이를 탔던 기억이나 놀이터에서 당당하게 ‘깍두기’라는 지위를 요구하며 언니 오빠들과 뛰어놀던 기억은 이제 비릿한 쇠냄새와 흙냄새 풍기는 추억이 되었다. 또 한여름의 주말마다 수영장에서 하루종일 물속을 해마처럼 떠다니느라 입술이 새파랗게 질리고 손발이 퉁퉁 불었던 기억, 그렇게 배고픈지도 모를 만큼 제 몸도 잊어버리고 놀다가 수영장을 나오면 일주일은 굶은 듯한 허기가 밀려왔던 기억, 택시비까지 몽땅 군것질거리에 쏟아붓는 바람에 걸어서 집에 돌아오느라 애써 씻어서 뽀송해진 몸을 다시 땀으로 씼어야 했던 기억은 우렁찬 매미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떠올리게 되는 뜨거운 여름의 추억이다.
가족들에게 한없이 무심한 지금의 나와 혼자 있기를 견디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내가 같은 사람이라니. 언제 어디서나 언니들의 옷자락을 꼭 쥐고 다녔던 내가 그냥 사랑받고 싶었던 한 아이였다는 걸 생각하면 서글퍼진다. 충분히 사랑받는 아이였다면 사랑을 구걸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쌍둥이 언니들은 나이가 같아서 학년이 올라갈 때도, 학교가 바뀔 때도 늘 함께 움직였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내가 6학년, 언니들이 중학교 1학년이 되던 새 학기 첫날, 나와 정반대 방향으로 등교하는 언니들의 뒷모습을 세상이 무너져내리는 심정으로 바라봤던 기억은 지금도 선연하다. 중학교로 진학하게 되었을 때도 언니들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되어 기쁜 마음은 잠시, 중3 때 다시 나는 홀로 남겨져야 했다. 그제야 나는 체념할 수 있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좁혀지지 않는 자매들과의 물리적 거리감이 그때 내 안에 ‘결국은 혼자’라는 감각을 일깨워 주기도 했다.
언니들은 초, 중, 고, 대학교를 함께 다닌 것도 모자라 첫 직장까지 같은 곳으로 다녔다. 이미 나는 언니들을 향한 애착에서 벗어나 나만의 세계를 구축해 가는 시점이었기에 질투 난다거나 부러운 마음이 들진 않았다. 그저 신기했다. 제아무리 쌍둥이라지만 저렇게 똑같은 길을 오랜 세월 함께 걷는다는 사실이. 외모는 비슷할지라도 성격이 저렇게 다른데 저들은 그 긴 시간 동안 얼마나 서로에게 의지했을까? 그저 서로를 견디느라 고단하기만 했을까? 자주 궁금했으나 묻진 않았다. 궁금해도 묻지 않았고, 묻지 않으니 서서히 자매들에 대한 물음표도 사라졌다. 언니들도 나와 다르지 않았으리라. 사회초년생이었던 그때의 우린 각자의 세계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팽창하는 것을 감당하느라, 자기 존재의 쓸모를 탐구하느라 서로에게 나눠줄 관심은 조금도 없었으니까.
나까지 사회생활에 합류하고 나서야 우리 세 자매는 다시 서로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고, 딱 그만큼 서로를 애틋해했다. 내 생각이지만 우리 셋은 그 시기에 가장 끈끈했다. 서로에게 아무리 추한 모습을 보여도 ‘자매’라는 이유로 감싸줄 수 있었고, 감싸줄 수 없다면 거침없이 쓴소리를 내뱉을 수 있었다.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는 쉬이 망가지지 않을 거라는 견고한 믿음이 우리에겐 있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나와 큰언니가 함께 독립한 지 2년 반쯤 지났을 때 다시 한번 깨졌다. 우린 더 이상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걸 알았고, 오히려 가족이기에 더더욱 조심해야 함을 지난 몇 년간 배웠지만, 우린 결국 ‘타인’일 수밖에 없기도 해서 크고 작은 충돌을 아주 피하지는 못했다. 한동안은 우리가 약속한 ‘싸워도 하루는 넘기지 않을 것.’이라는 규칙으로 작은 갈등을 무던히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차마 그러지 못할 만큼 큰 갈등이 생겼을 땐 서로에게 어떠한 배려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렇게 지낸 지 얼마쯤 지났을까. 언니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집을 나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동안 큰언니에 대한 원망과 분노, 억울함과 설움이 엉망으로 뒤엉킨 삶을 살기도 했다.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그냥, 상관이 없어졌다. 미운 마음도, 좋은 마음도 내 안에서 다 사라진 것 같다.
자매들과의 추억을 떠올리는 일은 나를 순식간에 아득해지게 한다. 너무 아득해서 이제는 우리에게 그런 일이, 그런 시절이 정말 있었나 믿기지 않을 때도 있다. 또 한편으론 씁쓸해진다. 치열하게 싸우면서도 좋으나 싫으나 함께일 수밖에 없었던 풋내 나는 시절의 우리와 조금 싸우다가 질려버리면 관계를 놓아버릴 수 있게 된 지금 우리들 사이의 낙차가 너무나 크다는 게. 그럴 때면 누구든 붙잡고 묻고 싶어진다. 그때의 우린 어디로 가고 있는 거냐고. 도대체 어딜 향해 가고 있는 거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