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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들렌 Nov 29. 2024

가을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수도권 곳곳에 폭설이 내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풍경이 SNS 피드를 빼곡하게 채운 11월 말이라니. 아직 12월이 채 되지도 않았건만. 공유된 사진들을 넘겨보다가 문득 어떤 씁쓸함에 사로잡힌 건 느린 자살, 제때 찾아오는 다채로운 행복의 소멸을 목격하고 있다는 달갑지 않은 진실 때문에. 내가 사는 지역에는 아직 눈이 내리지 않았지만 미처 눈이 되지 못한 비가 땅을 적시고 있다. ‘아, 가을은 깊어만 가고 그대 모습 볼 수가 없어 나는 이제 또다시 어디로 가야만 하나.’ 거실에 놓인 음향 기기를 타고 1988년의 황치훈이 노래한다. 지나간 계절을 아쉬워하는 내 마음을 대변해 주듯이. 이른 눈 소식에 서운함을 느낀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눈이 되길 거부한 이 비도, 깊어만 가는 가을을 목놓아 부르는 저 남자도 어쩌면 나와 같은 마음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제멋대로 생각해버리면 조금은 위안이 되니까. 아 가을은 가버렸나. 더이상 늦가을이라고 우겨 볼 수도 없게, 명백한 겨울이 정말, 왔나. 오고야 말았나. 이제 막 떠나간 가을이 벌써 그리워진다.


가장 좋아하는 계절인 겨울 앞에 마중물처럼 찾아오는 가을을 나는 좋아한다. 곧 도래할 겨울을 상상하게 하는 가을. 추워질 듯 말 듯 한 날씨, 떨어질 듯 말 듯 한 나뭇잎은 올듯 말듯 아직 오지 않은 겨울을 고대하게 한다. 기다림의 설렘을 증폭시키는 계절이 내게는 가을이다. 또한 가을을 채색의 계절이라 칭해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나무의 우듬지부터 밑동까지, 짙은 초록빛을 황금빛으로 서서히 물들이는 이 계절은 그것으로 족하지 않는다. 추풍낙엽으로 하여금 어느새 거리 곳곳을 노랗게, 붉게 칠하며 깊어감을 뽐내는 가을. 겨울을 유예하는 동안 가을은 착실히 무르익어간다.


극도로 상반된 옷차림이 말해주듯 여름과 겨울은 대척점에 있는 계절이지만 봄과 가을, 이 두 계절 사이에는 평행선이 존재한다. 입을거리를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또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라는 점에서. “가을은 모든 잎이 꽃이 되는 두 번째 봄이다.”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알베르 카뮈가 표현한 것처럼, 그러므로 봄과 가을은 몸들이 바깥으로 향하는 계절이다. 각각의 절경을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들로 두 계절은 어딜 가나 북적인다. 늦가을에도 예외는 없다. 그 북적임의 대열에 합류하여 담양에 다녀온 지난 주말. 그날은 6년이라는 시간 동안 내 삶의 일부이자 전부가 되어버린 반려견 오복이를 위해서, 개에게 더 넓고 다채로운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한 달에 한 번 세 자매가 모이는 날이었다. 결혼해 가정을 꾸린 작은언니의 새 식구들, 형부와 10개월 된 조카까지 더해지면서 우리의 늦가을은 한층 더 활기와 소란이 만만했다.


듣던 대로 연신 감탄사를 터트릴 만큼 아름다웠던 담양 메타세쿼이아 길. 곧고 넓게 뻗어 있는 길 위에는 제철 행복을 누리기 위해 모여든 인파로 붐볐다. 감동과 기쁨에 젖은 사람들의 비슷하게 닮아있는 표정을 관찰하는 행위는 내게 아늑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낯선 이들의 얼굴이 더이상 낯설지 않게 느껴질 때 문득 나는 편안해진다. 자연이 선사한 화려함에 매료된 타인의 표정에서 “행복이 뭐 별거 있니 이런 게 행복이지”라고 말하며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작은 언니를 본다. 보부상처럼 큰 가방과 조카의 짐가방을 양쪽 어깨에 둘러멘 것도 모자라 개의 하네스 줄을 잡고, 덜어줄 짐이 더 없는지 쉼 없이 두 눈 굴리는 큰언니를 본다.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를, 각자의 방식으로 풍경 속에 녹아든 세 자매를 관조하듯 번갈아 보는 형부의 묵묵하고도 다정한 시선을 본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에게서 나는 다시 나를 본다. 타인에게서 목격하는 내 모습과, 나에게서 발견되는 타인의 모습이 길 위에 찍혀 겹치고 포개진다. 이내 흩어지고 지워지는 발자국이 된다.


가을의 정취에 흠뻑 젖어 나릿나릿 걷고 있을 때 내 옆을 스쳐가던 한 남자의 말이 메아리처럼 울렸던 걸 기억한다. “내 말은 왜 여기서 끝을 보려고 하느냐 이거야. 아직 (길이) 많이 남았는데.” 입구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사진을 찍느라 좀체 이동할 기미가 없는 일행에게 일침을 놓는 말이었다. 그의 일행과 눈이 마주쳤고, 그와 나는 서로 멋쩍은 웃음을 주고받았다. 나는 끝을 보려는 그들의 심정에 십분 공감했다. 우리의 모습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으므로. 여기 모인 대다수가 보이는 비슷한 행동 패턴과 현상(여행 초반에 다수의 사진을 남기는 사람들과 대체로 명소의 입구 쪽이 붐비는 현상)은 어떤 초조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곧 떠나갈 이 계절의 잡히지 않는 아름다움이 아쉬워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 나의 오늘이, 애정하는 당신들의 모습이 시곗바늘 초침처럼 흘러가고 있기에. 서둘러 끝을 보지 않으면 영원히 끝에 다다를 수 없을지도 모르므로.


돌아온 후에도 나는  늦가을의 한 장면에 머물러 있다. 사진과 동영상을 꺼내 보는 방식으로. 황금빛 메타세쿼이아 길을 보러 갔던 그날, 내가 가장 많이 눈길 주었던 장면은 결국 나와 닮은 이들의 모습이었다. 풍경을 완성하는 건 결국 사람이라서. 내 사진첩에 담긴 그날의 추억에는 내 개와 자매들, 형부와 조카의 지분이 빼곡하다. 그러므로 사진은 말없이 보여주는 고백.


소리 없이 눈이 펄펄 나리는 날, 사진첩을 열어 그날의 기억을 꺼내본다. 새로운 자극에 말려 올라간 꼬리와 바쁘게 이 냄새 저 냄새를 향해 두드리는 오복이의 코. 도통 낮잠 들지 않는 아이 때문에 씻지 못하고 대충 모자를 눌러쓰고 나온 작은언니의 파란 모자. 지인의 결혼식장에서 곧장 합류한 덕에 맵시 좋은 정장을 차려입은 형부. 애들아 멈춰봐, 거기 서 봐, 저 노을 보여? 도율아! 오복아! 그 누구보다 늦가을 추억에 진심인 호들갑 섞인 큰언니의 목소리. 언니와 형부를 빼다 박은, 그러나 신기하게도 나와 큰언니를 한 방울씩 닮은 조카의 뺨에 묻은 금빛 노을. 나는 예감한다. 즉시 과거가 되어버린, 무슨 수를 써도 돌아갈 수 없는 이 장면들을 그리워하게 될 거라고.


극단으로 치닫는 날씨에 봄과 가을은 가물가물 스러져 가는 듯하지만, 아직까진 소멸하지 않았으므로 계절은 돌아올 것이다. 다만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했듯 “누구든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내가 발을 담근 시점의 물은 이미 흘러갔고, 역시나 다시 발을 담근다 해도 나의 발은 이전에 담갔던 발과 달리 아주 미세하게 늙어 있을 테니까.” 그리하여 돌아올 가을은 올해와 다른 가을일 것이다. 올해의 내가 내년의 나와는 다른 것처럼. <가을이 지나가는 길목에서>를 듣는 지금, 지나간 가을이 나는 빈틈없이 그립다.


(202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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