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새벽, 여름이가 죽었다.
죽음을 예상하지 못했냐고 묻는다면, 글쎄, 예상했는지도. 아니, 예상하지 못했나? 친구들이 찾아왔다. 괜찮냐고 묻는 전화에는 만족하지 못했는지, 내 얼굴을 봐야겠다며 굳이 여기까지 왔다.
지루하다. 죽은 사람에 대해 어쩌고, 저쩌고. 사람은 언제나 전시되는 존재라지만, 죽으면 정말이지 어두운 전시회 장 안 홀로 남은 유리장 속의 전시품처럼 씹어지고, 깎아지고. 지겨워.
뜻밖의 소식에 어떤 조문객은 신발도 채 벗지 못하고 여름이를 보고는 울었다.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이라는데, 여름이가 담임선생님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있었나? 왜 저렇게 울지.
술자리에서 몇 번 봤던 여름이 친구들이 왔다. 열기 때문인지, 얼굴이 벌게져서는 구석에서 술을 홀짝인다. 잊고 싶은 걸까. 꿈이었으면 하는 걸까. 선명해지기는 커녕 흐려지기만 할 텐데.
새벽에 죽은 여름이 덕분에, 하필 아직도 맨 정신이다. 분명 네 감긴 눈동자를 본 지는 24시간이 꼬박 지난 것 같은데, 여전히 해가 중천에 떠있다.
우리는 땡볕에 누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걸 좋아했다.
“내가 어제 달리다가 넘어졌거든. 여기 봐.”
여름이는 바지를 걷더니 아직 딱지가 채 나지 않은 상처를 보여주었다.
“진짜 아팠어. 말 한마디 못 나올 정도로. 그래서 가만히 앉아있었거든? 근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이렇게 무릎에 피가 난적이 언제였더라. 기껏해야 종이에 베이거나 밥 먹다가 입천장이나 데어봤지, 초등학교 이후로 처음 아닌가. 실룩실룩 웃음이 나더니, 아 나 살아있구나 싶은 거야."
“그게 뭐야, 너 살아있잖아.”
“아니 그런 거 말고. 진짜, 진짜 살아있는 거 말야. 막 새빨간 피가 철철..”
“윽 징그러워. 그만 그만”
해가 지면서 하늘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난 너의 무릎을 생각했다.
여름이는 견디지 못해 죽었다. 어느 시점인가 살아있다 보다는 살아지는 느낌이라서. 꽉꽉 막혀있는데 뒤에서 자꾸 미는 것만 같아서. 낭떠러지도 아닌데 한 발짝만 더 앞으로 가면 떨어지는 것 같아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해봤지. 술래라서 잠깐 뒤돌았다가 보면 막 성큼성큼. 그런 느낌이야. 뒤돌면 저만큼, 또 뒤돌면 이만큼, 그리고 어느샌가 내 그림자를 밟고 서있을 정도로 가까이 와있어. 난 뛸 준비도 못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름이를 꼭 안아주는 것뿐이었다. 말은 소용이 없었다. 물론 돌이켜보니, 안아주는 것도 소용이 없었다.
무언가 헛도는 느낌이라고 했다. 자전거에서 발을 헛디뎌 페달에 발이 끼이는 것처럼 자꾸 뭐가 잘 안 된다고 했다. 언젠가 여름이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봤을 때, 여름이는 뱀파이어가 되고 싶다고 했다.
"난, 뱀파이어가 햇살을 받으면 몸이 불타는 것처럼 그렇게 해를 똑바로 보면서 홀랑 다 타서 죽었으면 좋겠어."
"우리 엄마는 나한테 가끔 그래. 왜 그렇게 쓸데없는 데 마음을 두냐고. 그러다가 갑자기 나를 평가하기 시작한다? 어렸을 때부터 이랬네 저랬네. 자존감 문제니, 남자가 없어서 그렇다느니."
난 여름이를 사랑했다.
"난 마흔 살이 되는 그 새해 첫날, 죽을 거야. 호주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낸 다음에. 쪄 죽는 여름날의 크리스마스! 어때? 재밌을 것 같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 듣는 것은 썩 유쾌하지 않다. 하지만 여름이의 얘기를 듣는 건 언제나 즐거웠다. 그게 죽는 얘기라도.
여름이는 마흔 살이 되기 훨씬 전인 오늘, 죽었다.
"내가 죽으면 장례식장에 누가 올까? 장례식장이 사람으로 미어터졌으면 좋겠어. 친하든 안 친하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다 왔으면 좋겠는데. 엄마 아빠 부조금 많이 받아서 호강하라고."
여름이는 킥킥대면서 웃었다.
"근데 장례식장이 슬프면 싫을 것 같아. 그래도 마지막인데."
장례식장에는 끊임없이 사람들이 왔다. 그리고 사람들은 슬퍼했다.
여름이는 초복인 오늘 죽었다. 하필 복날에.
여름날의 크리스마스는 아니지만, 그래도 무더운 여름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