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ntwurf Aug 17. 2022

부치지 못한 편지

영화 her의 주인공은 편지 대필 작가이다. 사랑하는 연인이나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를 대신 써준다. 배경은 멀지 않은 미래 2025년, 편지에 들이는 시간과 마음까지 돈으로 사버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중얼중얼 편지를 쓰는 주인공은 꽤나 낭만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어렸을 때부터, 연말이 되면 아빠는 연하장을 가져와 친인척 분들에게 편지를 쓰게 하셨다. 꼬꼬마 시절에는, 엄마와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들어 반 친구들 모두에게 한 명씩 편지를 써서 건네준 적이 있다. 고등학교 때는, 아빠가 6개월에 한 번씩 기숙사로 편지를 보내주셨다. 그리고 편지를 읽고 쓰는 것은 어느새 내가 좋아하는 일이 되었다.       


편지를 쓰고 있으면, 몇 분이고 오로지 받는 사람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으로 시작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떠올리고, 함께 했던 시간을 다시금 곱씹어 본다. 한 문장씩 펜으로 적어 내려가는 그 마음은, 그저 백스페이스 버튼으로 지웠다 말았다 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언젠가는 부쳐야 할 편지가 있다. 아직은 쑥스러워서 보내지 못한.     


S에게     

  생각하면, 네가 분홍색 홍조를 띠고 눈꼬리가 휘어지게 웃는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올라. 그리고 어디선가 되게 달콤한 향기가 나는  같고, 지금 당장 상큼한 케이팝 노래가 들리는  같다고 해야 하나. 이렇게 생각만으로 달달한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야. 있잖아, 니키리는 유태오가 소년미를 잃을까  힘든 일을 자기가  떠맡아서 했다고 하더라. 나도 네가 너만의 모습을 잃지 않게 언제든지 너를 힘겹게 하는 것들을 덜어내줄  있는 친구가 되고 싶어. 내가 떠맡아볼게. 그러니까, 너는 10, 20, 50 후에도 지금의 너를 잃지 .          


Y에게     

한 사람에게는 일생 동안 누릴 수 있는 행운의 양이 정해져있대. 그래서 불운이 찾아와도, 곧 행운이 찾아오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고 하더라. 근데 난 남은 행운이 얼마 없지 않을까, 싶어. 10대에 너를 만나, 지금까지 네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것에 행운을 무진장 끌어서 한 번에 써 버린 게 아닐까. 삶이 영화 같았으면 좋겠다고 꿈꾸는 나에게, 너와의 시간은 어떻게 끝나버릴지 모르는 시트콤 같아서 참 좋아. 어떤 관계든 문득 허무해지는 순간이 한 번쯤은 찾아온다던데 너와는 언제까지고 이렇게 좋을 거라고 확신이 든다. 전적으로 누구의 편이 된다는 건 어려운 일이잖아. 어딘가 잘못된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이면, 잡아주려고 나서는게 대부분이니까. 그런데 넌 내가 아무리 방황할지라도 날 믿고 결승점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야. 정말 내게는 그런 존재가 필요했는데 말이야. 외로움을 은근히 타는 내가, 외로움을 전혀 모르고 살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작가의 이전글 여름의 초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