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11월 모평을 망친 그날.
오답노트를 제출하라는 담임선생님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위로랍시고는 교실 뒤 편에 쭈그려 앉아 구오빠의 노래를 들으며, 수능이 1년도 채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멍하니 남몰래 눈물을 찔끔 흘렸다. 모의고사 성적이 곧 수능 성적이라는 그 흔한 말은 그날따라 가슴에 콕콕 박혔고, 눈치 없이 어둑어둑 해가 져버린 하늘이 미웠다.
중학교 2학년, 첫 남자 친구와 헤어진 그날.
이별은 예감했지만, 그 짧은 운동장 반 바퀴를 걷는 동안 아무런 말 없이 이어졌던 공백은 나에게는 족히 30분이었다. 혼자서 눈을 질끈 감아보기도 하고, 꽁꽁 언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괜찮은 척 걸어봤지만 이미 결과는 정해져 있었고 남은 것은 확인이었다. 그래서 물었고, 대답받았다. 운동장 저편의 그네까지는 걷지도 못하고 그대로 뒤돌아 뛰었다. 얼굴에 닿는 차가운 바람을 녹여주려고 하는 듯 뜨거운 눈물은 계속, 계속 흘렀다.
대학교 2학년, 엄마랑 싸운 날.
수도꼭지가 열린 듯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엄마가 나를 믿어주지 않는다고 느끼니, 엄마에 대한 미움과 나 스스로에 대한 의문과 원망이 있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우울한 마음은 끝없이 가지를 쳤다. 차라리 처음부터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버튼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고등학교 2학년, 친구들을 속상하게 한 날.
초등학교 5학년, 엄마 아빠에게 혼난 날.
중학교 3학년, 친구 집 앞에서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펑펑 운 날.
대학교 3학년, 무기력에 잠식되어 아무것도 하기 싫었던 날.
고충을 털어놓을 때, '괜찮아. 나도 힘들어'라는 말만큼 힘이 쭉 빠지는 대답도 없다. 사람들은 흔히 '괜찮아, 너만 힘든 거 아니야. 다 힘들지' '너보다 이렇게 저렇게 힘든 사람도 있는걸? 그러니까 힘내.'라는 식의 위로를 건넨다. 그러나 내가 겪는 아픔을 남들도 똑같이 겪는다는 그 사실 자체는 위로가 되기 힘들다. 더군다나 남의 불행을 위안삼아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에도 없다.
'괜찮아, 힘내! 별거 아냐!'라는 단순한 위로는 가끔 쓸모 있지만, 사용제한이 있어서 그 효과를 발휘할 수 없을 때도 있다.
그때면, 나는 어릴 때의 나에게서 위로를 받는다.
스물네 번의 해를 넘기는 동안 힘들었고, 우울했고, 후회했고, 아팠던 일은 종종 있었다. 눈앞에 닥친 그 일은 내 인생을 뒤흔들었고, 나를 잠식시켜버렸다. 그리고 잠을 설쳐가면서 온전히 그 불안과 혼란을 받아내는 내가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기억 한편에 두고 가끔씩 추억하는 일이 되었다. 지금은 별거 아닌 일이 되었지만, 그때 그 순간에는 나를 압도해버렸던 일. 어리석었고, 눈물을 멈출 수 없을 만큼 슬펐고, 미성숙했고, 혼자 감내해야 했지만, 참 단단하게 잘 이겨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그런. 그로 인해서 지금의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 큰 위안을 느낀다. 1년 후, 아니 한 달만 지나도 그때 했던 고민을 추억하며 싱긋 웃을 수 있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생긴다.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 전속력으로 힘을 마구마구 보나고 있다. 뒤돌아서면 꼬꼬마 초등학생의 나가, 앞을 바라보면 뭐든지 잘 해나는 30대의 내가 나를 응원하고 있다. 항상 언제나 나를 믿어주는 사람은 결국 내 자신이라는 것. 언젠가는 오늘의 아픔도 그땐 그랬지 하면서 추억할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