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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twurf Nov 03. 2021

결국, 나 자신

고등학교 2학년, 11 모평을 망친 그날.

오답노트를 제출하라는 담임선생님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위로랍시고는 교실 뒤 편에 쭈그려 앉아 구오빠의 노래를 들으며, 수능이 1년도 채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멍하니 남몰래 눈물을 찔끔 흘렸다. 모의고사 성적이 곧 수능 성적이라는 그 흔한 말은 그날따라 가슴에 콕콕 박혔고, 눈치 없이 어둑어둑 해가 져버린 하늘이 미웠다.


중학교 2학년, 첫 남자 친구와 헤어진 그날.

이별은 예감했지만, 그 짧은 운동장 반 바퀴를 걷는 동안 아무런 말 없이 이어졌던 공백은 나에게는 족히 30분이었다. 혼자서 눈을 질끈 감아보기도 하고, 꽁꽁 언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괜찮은 척 걸어봤지만 이미 결과는 정해져 있었고 남은 것은 확인이었다. 그래서 물었고, 대답받았다. 운동장 저편의 그네까지는 걷지도 못하고 그대로 뒤돌아 뛰었다. 얼굴에 닿는 차가운 바람을 녹여주려고 하는 듯 뜨거운 눈물은 계속, 계속 흘렀다.


대학교 2학년, 엄마랑 싸운 날.

수도꼭지가 열린 듯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엄마가 나를 믿어주지 않는다고 느끼니, 엄마에 대한 미움과 나 스스로에 대한 의문과 원망이 있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우울한 마음은 끝없이 가지를 쳤다. 차라리 처음부터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버튼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고등학교 2학년, 친구들을 속상하게 한 날.

초등학교 5학년, 엄마 아빠에게 혼난 날.

중학교 3학년, 친구 집 앞에서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펑펑 운 날.

대학교 3학년, 무기력에 잠식되어 아무것도 하기 싫었던 날.


고충을 털어놓을 때, '괜찮아. 나도 힘들어'라는 말만큼 힘이 쭉 빠지는 대답도 없다. 사람들은 흔히 '괜찮아, 너만 힘든 거 아니야. 다 힘들지' '너보다 이렇게 저렇게 힘든 사람도 있는걸? 그러니까 힘내.'라는 식의 위로를 건넨다. 그러나 내가 겪는 아픔을 남들도 똑같이 겪는다는 그 사실 자체는 위로가 되기 힘들다. 더군다나 남의 불행을 위안삼아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에도 없다.

'괜찮아, 힘내! 별거 아냐!'라는 단순한 위로는 가끔 쓸모 있지만, 사용제한이 있어서 그 효과를 발휘할 수 없을 때도 있다.


그때면, 나는 어릴 때의 나에게서 위로를 받는다.

스물네 번의 해를 넘기는 동안 힘들었고, 우울했고, 후회했고, 아팠던 일은 종종 있었다. 눈앞에 닥친  일은  인생을 뒤흔들었고, 나를 잠식시켜버렸다. 그리고 잠을 설쳐가면서 온전히  불안과 혼란을 받아내는 내가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기억 한편에 두고 가끔씩 추억하는 되었다. 지금은 별거 아닌 일이 되었지만, 그때  순간에는 나를 압도해버렸던 . 어리석었고, 눈물을 멈출 수 없을 만큼 슬펐고, 미성숙했고, 혼자 감내해야 했지만,  단단하게  이겨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그런. 그로 인해서 지금의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  위안을 느낀다. 1 , 아니  달만 지나도 그때 했던 고민을 추억하며 싱긋 웃을  있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생긴다.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 전속력으로 힘을 마구마구 보나고 있다. 뒤돌아서면 꼬꼬마 초등학생의 나가, 앞을 바라보면 뭐든지 잘 해나는 30대의 내가 나를 응원하고 있다. 항상 언제나 나를 믿어주는 사람은 결국 내 자신이라는 것. 언젠가는 오늘의 아픔도 그땐 그랬지 하면서 추억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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