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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 Mar 09. 2023

관계와 여유

디딜 틈 없이 꽉 막혀있었다

이 문장을 쓰는 것이 정말 부끄러운데, 나는 친구가 없다. 아예 없는 건 아니고 많지 않다. 일상은 매일 집-회사-(가끔 운동)-집을 전전할 뿐이고, 몇 달에 한 번 친구를 만난다. 카카오톡을 열어 지금 당장 친근하게 "뭐 해?"라고 보낼 수 있는 사람이 연인 제외 단 5명. 세간에 친구 1-2명만 제대로 사귀어도 성공한 인생이라고 하니 다행이지만, 솔직히 남들이 보기엔 친구 농사 망한 케이스나 다름없다.


지금 남아 있는 친구들의 경우 오랜 시간을 함께하고, 간간히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종종 얼굴을 마주한 사람들이다. 학교 외 밖에서 따로 만나지 않았던 고등/대학생 친구들과는 이미 모두 연락이 끊긴 지 오래다.


이렇게 된 이유는 단 하나다. 스스로 단절을 택했다.


중학생 시절 안 좋은 일을 겪고 난 이후로 나는 사람을 사귀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와 같은 중학교에 올라가서 배신 아닌 배신을 당하니 사람을 사귀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당시 그들은(여러 명이었는데 친했던 친구가 그중에 있었다) 내 성격이 맘에 안 들었기 때문이라지만, 그걸 표현하는 방식은 그저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그러한 일이 일어난 이후 나에게 있어 먼저라는 것은 없었다.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같이 하자고 물어보았을 때, 정말로 시간이나 상황 여건이 맞지 않아 함께 할 수 없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말 그대로 받아들이질 못 하고 그저 내가 싫어서, 나와 함께 하기 싫어서 에둘러 표현하는 거로 밖에 느끼질 못 하게 되었다.


그래서 타인에게 버림받거나, 무언가를 제안했을 때 거절 당하는 것이 두려워 먼저 말을 거는 것을 꺼리고 남이 먼저 다가와 주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 마저도 결국엔 나 혼자 남겨진다거나 하는 어떤 불안한 상황이 올 것 같다고 느끼면 거절하기도 했다. 그러한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말이다.


혹은 그저 가만히 있었다. 먼저 나섰다가 받게 될 부정적인 상황들을 무조건적으로 피하며, 사회생활은 할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의 대화만 주고받았다. 타인과 언제 끊겨도 문제 되지 않을 얄팍한 관계만을 유지하며 자발적 아웃사이더를 자처했다. 전문적인 용어로는 이를 '회피성 인격 장애'라고도 한다더라.


회피성 인격 장애는 거절, 비판 또는 굴욕의 위험이 있는 사회적 상황이나 교류를 피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회피성 인격 장애가 있는 사람은 거절, 비판, 창피를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러한 반응을 경험할 수 있는 상황을 피합니다.
의사는 거절과 반감에 대한 두려움, 또는 사회적으로 무능하거나, 매력이 없거나, 타인보다 열등하다는 느낌으로 인해 대인 접촉을 포함하는 상황을 피하는 등 특정 증상을 근거로 회피성 인격 장애를 진단합니다.
출처 : MSD 매뉴얼


이렇다 보니 나 혼자 다니는 것이 습관이 되었고, 혼자 다니는 일이 그다지 힘들지 않다는 걸 깨달은 것도 한 몫한 듯싶다.


"나도 다른 사람한테 거절당하는 거 싫어", "나도 창피당할까 봐 무서워"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두려운 마음을 안고 도전한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나는 그 도전과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사람을 만나고, 이후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 상처 입게 될 그런 상황이 오는 것 자체가 나에겐 너무 두렵고 무서운 일이기 때문에 사람을 만나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그저 감정이 배제된 어떤 상황으로 인한 거절임에도 나에겐 잘 벼린 칼날로 느껴진다.



하루는 연인이 직장 선임과 둘이 저녁 술자리를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선임이 그 술자리 근처에 자신의 친동생이 있다면서 같이 마셔도 되냐고 하더랬다. 연인과 선임의 동생은 다 같이 몇 번 게임을 한 적은 있지만, 아주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데 연인은 상관없다고, 같이 마시자고 그랬다고 한다. 아싸인 나로서는 소위 MBTI E 성향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만큼 연인은 나와 다르게 친화력이 좋은 사람이다. 매일 잠깐이라도 대화하는 고등학교 친구들 단톡방이 있고, 일을 쉬는 날에는 종종 동네 친구들과 만나 밥을 먹기도 한다. 내 최근 통화 목록에는 가족과 연인 망할 스팸전화밖에 없지만, 연인의 통화 목록에는 나, 가족, 그리고 친구들이 있다.


연인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에 별로 거리낌이 없었다. 조금 어색할 순 있어도, 나처럼 거절하지는 않았다. 나와 내 친구 사이에 껴도, 성격이 잘 맞는다면 내 친구와 금방 잘 지내곤 한다.


연인은 리그 오브 레전드(이하 롤) 게임을 좋아한다. 롤은 최대 다섯 명까지 여러 명이 함께 할 수 있는 게임인데, 연인은 이 게임을 할 때면 주변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려 같이 할 사람을 물색했다(물론 이 게임을 하는 사람이 한정적이기에 매번 같은 사람들에게 물어보긴 한다). 그중 유독 연인의 제안을 계속 거절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10번을 물어보면 8~9번은 부정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왜 매번 거절당하는데 자꾸 같이 하자고 해?"
"그래도 가끔 같이 할 때도 있으니까?"


안타깝지만 연인의 대답이 나에게 크게 와닿지는 못 했다. 나는 여전히 거절당하는 것이 싫어서 그렇다. 그래도 그 답변 속에서 어떤 여유를 본 것 같았다. 나처럼 마음속이 인간에 대한 상처와 불신으로 뒤덮인 것이 아니라, 8~9번 거절해도 1번의 승낙 정도면 지금까지의 거절은 괜찮은 듯한 여유.


원래 인간이란 가질 수 없는 것을 부러워하고 질투한다 했던가, 나는 연인의 이런 여유로움이 부러웠다. 사실 친구가 많은 것도 좀 부럽긴 했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라면 열 번이 아니라 세 번 정도 거절 당하면 아마 다시는, 절대로, 먼저 무언가를 하자고 말 걸지 않았을 것이다. 인연을 단 번에 끊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마 점차 멀어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연인은 달랐다. 이 친구가 거절? 그럼 다른 친구에게 물어보지 뭐. 그러고도 정 없으면 혼자 해야지.


본인 역시 거절당하면 상처를 안 받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친구이기도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할 수도 있는 거라면서, 거절하는 것도 어쨌든 연락을 하고 지내는 사이라는 거니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 거절은 그 상황에 대한 거절일 뿐으로만 여기고, 더 깊은 생각으로 가면 안 된다면서.


연인의 높은 친화력에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여유를 갖고 있냐 묻는다면, 많이는 아니고 조금 생긴 편이다.


연인과 나는 게임을 즐겨하는 편인데, 연인의 친구들도 같은 게임을 하고 있어서 온라인상으로 자주 만나는 편이다. 연인의 친구이지만 나에게 있어 그들은 새롭고 낯선 사람들인데, 다행히 모두 성격이 좋아 나를 별로 꺼려하지 않고 다 함께 재밌게 대화하며 지내고 있다.


연인과 같이 대화 속에서 오고 가는 부정적인 상황에 크게 신경 쓰지 않겠다는 마인드, 있지도 않은 여유로움을 억지로라도 장착하고 마주하니, 사람을 만나는 것이 많이 어렵지 않았다. 그동안 나 혼자 너무 오두방정을 떨었던 게 아닌가 싶었다.


이미 10년을 넘게 이러한 성격으로 살아온 나이기에 언제 불쑥 기존에 갖고 있던 회피성 기질이 튀어나올지는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연인을 통해 의도치 않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타인과 조금은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다.


아마 예전만큼 인연을 싹둑싹둑 자르는 버릇은 조금은 고쳐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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