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 <무빙> 리뷰
그간 국내에서 괄목할 만한 오리지널 시리즈를 내놓지 못하고 하락세를 보이던 위기의 디즈니플러스가 <무빙>이라는 커다란 돌파구를 뚫어냈다. 작품 공개 이후 8, 9월의 월간 이용자 수는 2배나 증가하였고 3분기 순이익 상승에도 크게 기여하며 디즈니플러스의 한국 대표작으로 자리 잡았다.
최근 드라마계는 점점 더 짧은 호흡의 작품을 찾는 시청자들의 선호에 따라 회차를 12부 아래로 끊어내는 추세이다. 한편 <무빙>은 20부작에 걸쳐 방대한 세계관이 펼쳐지는 것은 물론, 이를 구현하기 위해 무려 500억의 제작비가 투입되었다. 게다가 한국에선 생소한 히어로물이기까지. 그러나 이러한 위험 부담에도, 탄탄한 스토리와 개성 있는 캐릭터들을 섬세하고도 힘 있는 연출로 담아내 시청자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지금껏 한국에서도 여러 차례 히어로물을 시도하였으나 한 두 작품을 제외하고선 큰 성과를 내지 못한 채 혹평으로 막을 내리기 일쑤였다. 마블 유니버스로 ‘히어로’를 접해온 대중들이기에 어쩌면 그 기대치를 쉽게 충족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무빙> 역시 하늘을 날고 괴력을 쓰는 초능력자들이 등장하지만, 토르나 캡틴 아메리카에 비하면 견줄 바는 아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시시한 히어로물로 남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가진 초능력보다 그 초능력을 어떤 마음으로 사용하는가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적은 세계의 평화나 시민들의 안전이 아니다. 적진을 몰살시키거나 완벽한 승리를 거두는 통쾌함도 존재하지 않으며 종국에는 더 이상 초능력자로 살지 않기를 선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반쪽짜리 히어로들이 가족, 연인, 친구가 위험에 처한 순간에는 지구상에서 가장 무자비하고 강한 사람이 된다. 세상의 영웅이 아닌 나만의 영웅, <무빙>이 히어로를 정의하는 방식이다.
<무빙>이 한국형 히어로물의 등장이라 평가받는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다. 부모 세대가 안기부 소속 블랙 요원으로 활동했던 1990년대부터 시작해, 초능력을 물려받은 자식 세대가 고등학생이 된 2018년에 이르기까지 대략 20년의 서사를 다루고 있으며 그 안에 87년 KAL기 폭파 사건, 94년 김일성 사망 사건, 96년 강릉 무장 공비 침투 사건 등 한국의 여러 역사적 사건이 녹아있다. ‘남과 북에 정체를 숨기고 활동하던 초능력자들이 있었다’라는 상상력과 서로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가족 히어로의 모습은 할리우드에선 볼 수 없었던 한국형 히어로물만의 매력이다.
이에 더욱 몰입감을 더하는 건 바로 전개의 방식인데, 시간순이 아닌 현재-과거-현재 순의 3장 구조를 가진다. 학생들이 등장하는 초반부에는 풋풋한 학원 로맨스물 같다가도, 부모의 과거 밝혀지면서부턴 멜로, 조폭 액션, 첩보물 등이 마구 뒤섞인다. 후반부 북한 능력자들의 등장은 냉전 드라마의 시작을 알리고 마침내 현재로 돌아와 모든 인물들이 한데 모이는 순간에는 거대한 액션 활극이 펼쳐진다. 이처럼 수많은 장르와 캐릭터가 계속해서 변주하여 등장함에도 과하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광활한 장소와 긴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결국 모든 사건은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을 향해 달려간다.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든 주인공들에게 중요한 건 오직 내 주변의 사람들이다. 세상의 관점에선 사소하고 보잘것없을지 몰라도, 내 안에선 가장 커다란 존재인 가족, 친구, 연인을 사랑하는 이야기이기에 우리는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국적과 세대를 막론하고 통용되는 불변의 법칙이다.
시공간의 제약 없이 세계관을 구축할 수 있는 건 이제 그림이나 활자뿐만이 아니다. <무빙> 역시 2015년 원작 연재 당시엔 영상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짐작할 수조차 없었겠지만, 이제는 그 어떤 장면도 완성도 있게 구현할 수 있을 만큼 기술력과 환경이 뒷받침되고 있다. 한국 드라마에서 하늘을 날아다니고 건물을 부수는 히어로 캐릭터를 보는 것이 이토록 즐겁고 반가울 수 없다.
<무빙>의 장면 곳곳에는 원작자이자 각본가인 강풀 작가의 또 다른 웹툰 <타이밍>, <브릿지>에 관한 떡밥이 등장한다. <무빙>이 신체 능력자들의 이야기라면 <타이밍>은 시간 능력자들의 이야기이며 <브릿지>는 이 두 세계관을 한 데 어우르고 있다. 시기상조일 수 있지만, 각본가로서 화려한 데뷔를 마친 강풀 작가가 그려낼 다음 히어로의 사연도 무척 기대가 된다. 사람 냄새 가득한 전장의 이야기를 한 번 더 만나고 싶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