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시네마에서 배제된 것들에 대한 옹호
개인적인 연대기
오늘의 ‘나’는 과거 2019년의 ‘나’에 비해 상당한 질적 변화가 있음을 느끼고 있다. 우선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은, ‘모션그래픽(Motion Graphics)’인데, 뉴미디어 환경에서 ‘포스트 시네마’ 범주로 묶을 수 있는 새로운 영화적 형식들이다. 과거의 나는 이 스크린 속의 가상(Schein) 들을 어떻게든 나의 좋은 포트폴리오로 만들어 보려는 야욕만이 있었다.
왜냐하면, ‘테크닉’적으로 우수한 ‘졸업 작품’만이 내게 좋은 취업 기회를 제공할 것이고, 더 나아가 자본적, 사회적 여유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꽤나 목적론적인 ‘신화(Myth)’를 믿었다. 요컨대, 만성적인 비염 알레르기와 같이 나를 괴롭히는 ‘돈 없음’ 상태에서 벗어나고픈 "~로부터의 자유"란 가치만이 나를 추동하는 힘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오용된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본적으로 독립을 이루어야 하는 과제에 당면했던 것인데, 그런 상황 속에서 난 생(生)의 존재론적 근거를 가시적인 ‘성과’에서만 찾은 것이다. 즉, ‘나’라는 존재의 생(生)의 층위는 사유하고 반성하지 못하는 ‘생존’의 층위에 머물렀었다. 생존을 위해서 1차원적으로 필요한 것은 ‘자본적 자유’였고 이에 대한 근거를 ‘모션그래픽을 통한 성과’라는 총체적 부패상태의 신화적인 것에서 밖에 찾지 못하였다.
다시 첫 부분으로 돌아가 보자. 나는 앞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의 생각에 상당한 질적 변화가 있었음을 서술하였었다. 그럼 지금의 나의 생각은 무엇을 지시하는가? 그것은 ‘모션그래픽’이란 작업을 단순히 후기 자본주의의 논리에 입각하여 지배-이데올로기를 더 견고화시키는 하나의 도구적 예술이라는 특질을 벗겨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유미주의 예술을 더 옹호하자는 제안은 아니다. 다만, 기존에 논의되던 모션그래픽의 '탁월함'이란 기준이 대부분 ‘사실주의(Realism)’와 얽힌 담론이 아닌, ‘사상주의(Photorealism)’의 차원에서 논의되었음을 반성해 보고자 제안하는 것이다. 또한 이런 ‘사상주의’로 은폐된 CG Animation들의 미학적 기준이, 물신주의에 의해 은폐되었음을 비판해 보는 것이다. 이런 사변적 행위를 통해, 포스트 시네마라는 새로운 지평 속에서, 모션그래픽이 예술적 저항이란 가능성을 품어낼 수 있을지 검토해 보려는 것이다.
영상제작, 사전적 배제의 논리 : Photorealism
철학자 프랑수아 리오타르(Jean Francois Lyotard)는 그의 논문 <반(反) 영화>에서, 영화 제작의 논리는 ‘배제’의 논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배제와 통제는 사회적인 총체성의 기대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러한 메커니즘은 영화예술마저도 ‘사회적, 자본적 효용성’이란 판단 하에 위치시킨다. 이로 인해 비-생산적인 움직임들은 모두 통제되고 영화 자체도 사회적 유기체의 통일성에 사로잡힌다. 필름 이후의 포스트시네마 역시 동일화되고 있다. 디지털 영화의 CG이미지는 이제 두 차원의 통제관에 의해 평가당한다. 첫 번째는, 스크린의 아마추어 디자이너와 새로운 실험에 대한 ‘사전적 배제’이며, 두 번째는 생산-소비 효용성에 기초한 디자이너의 자기 전시에 의한 ‘사후적 배제’이다.
과거의 사회에서는 일과 집, 그리고 업무 도구와 여가의 방식이 비교적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이에 반해 오늘날의 디자이너들은 뉴미디어의 인터페이스와 디지털 문화를 일터와 여가(집)의 분리 없이 동일하게 사용한다. (크롬, MS 등) 포터블 디바이스와 네트워크의 기술적 진보는, 사람들 간의 신속한 커뮤니케이션과 광범위한 데이터베이스의 접근을 용이하게 만들었으나, 세계를 ‘초 단위’의 통신망으로 묶어냈다. 이로 인해 일-여가의 이질성은 더욱 확실히 제거되었다. 오늘은 기다림과 사색이 불가능한 세계이며, 언제 어디서든 실제적 세계와 부호화된 디지털 세계의 변수들에 즉각 대응해야만 하는 세계가 되었다. 즉 지구가 이젠 하나의 거대한 ‘감옥’과 같은 상태가 된 것이다.
이러한 양태는 ‘사전적 배제’로서의 영상 제작 메커니즘의 토대가 된다. 업무 도구로서의 그래픽소프트웨어와, 문서편집기, 그리고 여가의 방식으로서의 웹사이트, OTT, 게임 등의 인터페이스는 모두 동일한 영화적 사고의 논리에 기반한다.*[1] 이런 직사각형의 HCI는 계속해서 디자이너에게 품질 좋은 고해상도의 mov를 일-여가의 구분 없이 상영한다. 이 일방적 상영은 후기자본주의의 ‘맞춤 생산’, ‘맞춤 배달’이라는 원칙 하에, 다양한 SNS채널 및 큐레이팅 플랫폼등을 통해서 디자이너에게 제공된다. 그리고 이런 제공의 원칙은 마치 다양한 취향의 이미지들이 제공되는 듯한, ‘다양성’이라는 기만작전 속에 은폐된다. 이 은폐와 기만 속에서 미학에 대한 진리언표적인 규범성이 태동한다. 특히, 모션그래픽과 3D CGI에 대한 미학적 규범은, ‘좋은 디자인’, ‘좋아 보이는 디자인’이란 제목등을 통해 일종의 감각적인 것들의 분할을 만드는데, 그러한 분할은 철학자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말한 구별짓기(Distinction)에 다름 아니다. 이 구별지음은 이제 자의적이고 반성없이 ‘좋음’과 ‘나쁨’을 구별 짓고, 이러한 구별지음을 통해 CGI의 전문가와 아마추어는 명확히 분리된다. 분리의 준거는 “존재론적인 근거는 자본의 투입 대비, 얼마나 효용성 있게 작동하는가”이다. 이 자본적 효용성만을 따지는 오성적 지각은, CG이미지의 새로운 실험적 시도들을 아마추어의 영역으로 추방하며, 그래픽소프트웨어의 기술적 진보와 업데이트가 그들의 미적 판단 기준이 된다. 포스트시네마로서의 새로운 영상의 한 범주인 '모션그래픽'은 규범화된 기준에 맞춰 배제의 논리대로 작동한다. 결국 치안적 질서를 위한 하나의 도구적 수단으로서 빛을 바라게 되는 것이다.
*[1] 가령, 이동식 카메라의 확대, 좌우이동, 달리 인, 트래킹과 같은 인터페이스 조작, 컷 단위의 화면 전환과 같은 웹사이트의 모듈성, 시네마와 HCI(Human Computer Interface)의 직사각형이란 프레임 구조, 게임 및 문화인터페이스 차원과, 영화적 차원의 동일한 상호작용성 등이 있다. 즉 오늘날 뉴미디어의 원리는 약 100년부터 필름 영화에서 규범화해 온 눈부신 성과들에 ‘영상’의 언어에 기대고 있다.(기호학적 언어의 뜻은 아님)
영상제작, 사후적 배제의 논리 : Multi-tasking
모션그래픽디자인 작업은 다른 뉴미디어 아트 보다도 더욱 멀티태스킹(Multi-tasking)적이어야만 한다. 특히 3D 제너럴리스트로서의 디자이너에게는 멀티태스킹의 요청이 더욱 두드러지는데, 첫 번째 근거로는 그래픽 제작에 있어 소프트웨어 간 파이프라인의 영향을 받는다. 이 맥락에서 중요한 점은, 모션디자이너는 분업화된 각 제작 파이프라인을 엄수해야만 하며, 그래픽 소프트웨어의 인터페이스와 오퍼레이션은, (종류가 많긴다고 한들)제한된 선택지만을 제공한다. 이로 인해, 디자이너는 기획과 달리, 기존에 존재하는 소프트웨어와 써드파티 플러그인에 근거해서 제작하거나, 혹은 선험적인 원칙에 맞추어 디지털 이미지를 제작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오늘날 테크놀로지적 진보와 다양한 표현을 위한 기술적 RnD성과를 비추어보면, 이번 장에서 다루려는 배제의 논리와 부합하지는 않는 것 같다.
사실 더 중요한 쟁점은 두 번째 근거인데, 이것은 디자인의 사후적 배제에 숨겨진 ‘클라이언트’와 관계한다. 3D Animation은 대중 영역에서 더 활발히 사용되기 시작한 20th후반부터 몇십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여전히 ‘값이 비싼’ 디자인이다. 더불어, 복잡한 워크 프로세스와 모델링, 렌더링등의 정밀한 작업에 투입되는 인적리소스를 토대로 볼 때, 여전히 고도의 노동집약적인 산업이다. 그렇기에 <좋은 작품=높은 (자본)투자>라는 '레프 마노비치'의 통찰력 있는 공식이 여전히 성립한다.
다만,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소프트웨어의 진보와 자동화, 낮아진 접근성으로 3D Animation의 전반을 한 명의 디자이너가 이전보다 쉽게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즉 모든 파이프라인을 한 명이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를 위한 작업 방식이 멀티태스킹이다. ‘멀티태스킹’이란 사실, 수렵 사회의 생존 방식인데, 먹이를 먹으면서도 포식자와 경쟁자를 감시하고, 짝짓기 상대도 찾아야 하며, 새끼도 돌보아야 하는 생존 방식이다. 3D Generalist도 마찬가지이다. 리서치부터, 응대, 제작 전반을 도맡아서 신속한 맞춤 제작과 맞춤 배달의 원칙을 지켜야 만한다. 즉, 온전한 사색적 시간이란 특권을 상실한 상태, 거리 두기의 결핍으로 아우라가 지워져 버린 공간의 연속성 속에 개별자가 통합되는 상태에 다름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좋은 작업 = 높은 투자>이라는 규범 속에서, 디자이너는 멀티태스킹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그 순간 체계의 공격을 받을 것이다. 기획, 리서치, 파이프라인 간 작업들이 전부 총체화된 규범과 정해진 소프트웨어의 규칙 속에서 이루어진다. 디자이너는 모션그래픽에 대한 새로운 미학적 규범성이란 것이 조작되고, 자의적인 것이 아닌, 역사적이며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지각적 ‘사실’ 임을 받아들인다. 체계적인 조작은 새로운 실험의 가능성을 배제하며, 자의적으로 규정된 “좋음과 나쁨”의 간극을 유지한다. 이 간극의 유지는 지배-이데올로기에 기여하며, 오직 ‘전문가스러움’만이 그들 작업의 사후적 평가에 영향을 끼친다. 즉, 사후적 배제란 ‘높은 투자’에 어울리는 것만을 남겨놓는, 여전히 배제의 논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규범인 것이다.
결국 이 멀티태스킹이란 (랑시에르적) 치안의 질서를 유지하며, 새로운 감성적 분할을 통한 정치의 가능성을 거세시킨다. 오히려 무지몽매하게, 오성적이고 진리언표적인 사전적 배제를 통해 만들어지는 오늘날 CG이미지들은 이러한 ‘사후적 배제’ 하에 존재하고 있는듯 보인다. 요컨대, Realism이 아닌 Photorealism으로서의 차원의 예술만이 공간화된 웹에 전시될 수 있으며 반성이 없는 오직 생존만을 위한 (아도르노적인)'문화산업'이 된다.
디자이너들의 로고스적 능력을 위해서
다만, 앞선 나의 논변에 대해서, 기초적인 ‘생존’이 전제되어야 그다음 층위의 무엇들을 향유할 수 있지 않을까? 라며 의아하게 생각할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먹물들’이 ‘대중들’의 삶에 대해 사사로운 준거를 함부로 대어볼 수 있을 것인가?라고 생각하는 독자도 응당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명 이래 문화를 발전시킨 힘이 ‘사유하고 사색하는 시간의 힘’에도 상당 부분 근거하지 않는가? 이를 차치하고서라도, 배제된 존재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옹호하겠다는 근거 위에서 영상일반에 얽힌 나의 사변을 풀어내고자 하였다. 윤리적인 시시비비를 가려보자는 의도는 없다. 다만, 무엇이 개개인을 ‘오용된 자유’만을 찾도록 기만하고 있는지, 왜 진정한 자유가 아닌 일시적 포만으로 달려들고 있는지, 그러한 양태의 이면엔 무엇이 은폐되었는지, 이처럼 세계가 감각적인 것들을 ‘분할’하는 방식에 대해 검토해 보려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쟁점들을 영상의 차원에서 고민해보려 한다. 이런 텍스트작업을 통해 포스트 시네마의 한 형식인 ‘모션그래픽’이 저항의 가능성을 가진 예술로서, 로고스적 힘을 가진 예술로서 자리잡길 꿈꾼다. 더불어 뉴미디어의 디자이너들이 나의 논변에 부족한 점을 보충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