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의 어느 날 동리 선배와 나는 서점에서 만나 이 시집 저 시집 건드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 시집 표지 예쁘다, 표지 색깔은 시인이 고르나?, 우와 제목 어렵다, 이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각자 좋아하는 책을 꺼내서 보여주기도 하고, 내가 아는 가장 슬픈 시를 보여주겠다며 꺼내서 보여주고, 그 시를 읽은 선배도 슬퍼져서 눈을 부릅뜨고 눈물을 참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낄낄 웃기도 하는.
한가로이 흘러가는 시간이었다.
그러다가 선배가 시집을 하나 꺼내 들었다. “야 이거 제목 미쳤다.” 몸을 돌려 보니, 선배는 최지인 시인의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라는 책을 들고 있었다.
“일을 두 번 해야 사랑을 한 번 할 수 있단 거 아냐. 존나 슬퍼….”
나는 선배의 말에 문자 그대로 이마를 쳤다. (시인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인생의 진리가 눈앞에 활자로 박혀있었다. 아니 어쩌면 삶은 이보다 더 팍팍하게 굴러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가 아니라,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 이렇게 말이다.
SNS에서 ‘진짜 커피’와 ‘가짜 커피’에 대한 담론을 접한 적이 있다. 진짜 커피란 여유롭게 풍미를 즐기면서 마시는 커피고, 가짜 커피란 출근한 시간을 버티기 위해 카페인으로 머리를 한 대 치려고 마시는 커피라는 것이었다.
볼이 움푹 패도록 1L 커피를 빨아대면서 그렇다면 ‘진짜 삶’과 ‘가짜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했다. 내가 생각한 ‘진짜 삶’이란 사랑하는 사람들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는 것, 그거였던 것 같다.
언젠가부터 삶의 대부분의 면적을 일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진짜 삶’이라고 생각하는 무언가들은 그 틈새에 간신히 자리했다. ‘가짜 삶’을 사느라 ‘진짜 삶’을 살 시간이 부족하다고 투덜댔을 때, 어떤 사람은 ‘좋아하는 일을 하나 하기 위해서는 싫어하는 일을 열 가지 해야 한다’라고 말해줬었다. 현실적이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조언이었다.
강아지와의 산책도 ‘가짜 산책’과 ‘진짜 산책’이 있는 것 같았다. ‘진짜 산책’이란 화창한 날씨에 강아지와 교감하며 사뿐사뿐 걷는 그런 산책. 그렇지만 일주일 중 다섯 번 정도는 ‘진짜 산책’을 할 기회가 없었고 보통은 업무를 해치우듯 냅다 걸어버리는 ‘가짜 산책’을 하게 되는 게 일상이었다. 막차를 타고 간신히 퇴근해서 부랴부랴 강아지를 안고 나와 어두운 밤거리를 터벅터벅 걷는 그런 산책. 산책보다는 노동. 내 모습은 거의 개의 뒤에 따라붙은 망령 같았다. 그럴 시간마저 없는 날이면, 강아지 시터를 구해 산책을 부탁하고 나는 사무실에서 캠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돈을 벌기 위해 돈을 쓰는 이상한 광경이었다.
강아지와의 산책 말고도 나는 사랑하는 이들과 하고 싶은 게 많았다. 푹 자고 일어나 친구들과 브런치를 먹고 싶기도 했고, 가족과 저녁 연극을 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과 온전하게 하루를 보낼 수 있는 날은 일주일에 하루가 채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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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정말 갑자기, 살만해지는 시기가 왔다.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갑작스레 회사의 환경이 좋아졌던 것이다. 스트레스받는 일이 없는 건 당연히 아니었지만,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 업무를 버틸 힘이 다시금 충전되었다. 퇴근 후에 여유롭게 강아지와 산책을 했고, 강아지를 반기는 카페에 가서 커피도 마셨다. 나는 실제로 ‘살만하다’는 소리를 입 밖으로 자주 꺼냈고, 자연스럽게 연애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몇 년 만에 소개팅 앱을 깔았다. 사진을 보고, 자기소개 글을 읽고, 마음에 들면 오른쪽으로 스와이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왼쪽으로 스와이프. 서로 마음에 들었으면 매칭 완료, 채팅 시작. 오랜만에 하는 이 짜치는 행위가 너무 자극적이고 재밌었는데, 앱을 사용한 지 딱 30분 만에 질려버렸다. 아유 지겨워…. 중얼거리면서도 손가락을 사용을 멈추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뛰어든 연애 시장은 몇 년 전과 달라진 점이 거의 없었다. 외모가 마음에 들어도, 취미가 같아도, 가치관이 비슷해도 실제로 만났을 때 마음이 통하는 사람은 잘 없었다. 온라인 대화에 대한 피로감이 절정으로 쌓였던 어느 날, 앱은 또 한 명의 새로운 사람과 나를 매칭시켰다. ‘구’라는 닉네임을 쓰는 사람이었다. 프로필을 눌러보니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이었다. 이미 채팅이 지긋지긋해졌던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메시지를 보냈다. 거리도 가까운데 술 마실래요?
우리는 설 전날 밤에 만나기로 했다. ‘구’가 자신은 설 당일에 쉬니까, 설 당일 혹은 전날 밤에 만나는 게 어떠냐고 물었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시작했다. 연휴 내내 일하고 설 당일 딱 하루만 쉬는 직업이 뭐가 있지? 프리랜서인가? 같은 방송국 놈은 아니겠지…. 설마 전에 만났던 사람들처럼 간호사는 아니겠지?(제발) 3교대만 아니어라 제발. 스케줄 근무도 진짜 힘들 텐데. 연휴 중 설날 당일에 하루 쉰다는 ‘구’라는 사람은 추측하면 추측할수록 더욱 겹겹이 베일에 싸이는 것만 같았다.
구와 만나게 된 곳은 동네의 한 일본식 요리주점이었다. 상당히 허기졌던 우리는 김초밥과 전골, 화요와 토닉워터를 주문했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며 띄엄띄엄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면서 나는 가장 궁금해했던 상대방의 직업도 알게 되었다. 구는 (다행히) 같은 방송국 놈이 아니었고, 간호사도 아니었다. 구는 스케줄 근무를 하는 서비스직 종사자였다. 우리는 각자의 업무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나누었다. 그러다 문득, 새로운 누군가를 만났을 때 일에 대한 이야기를 비중 있게 나누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름을 묻고, 나이를 묻고, 사는 곳을 묻고, 그다음은 무조건 일 얘기였다. 무슨 일을 하는지, 왜 그 일을 하는지를 물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 삶에서 가장 많은 면적을 일에 할애하고 있기 때문일 터였다. 일은 어쩌면 그 자체로 우리의 삶이겠다고. 일을 기준으로 ‘진짜 삶’과 ‘가짜 삶’을 구분하는 게 아니라 삶의 정원 안에서 일이라는 텃밭 역시 곱게 가꿔야만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주문한 술과 음식이 나왔다. 나는 열심히 잔에 얼음을 담고 화요와 토닉워터를 섞고 레몬즙을 짰고 그동안 구는 전골을 앞접시에 덜어주었다.
구와 나는 몇 차례 더 만났다. 수없이 많은 대화를 나눴고 그 대화들을 통해 나는 구가 라면을 좋아하지 않는다든가, 코튼 100% 옷을 좋아한다는 자질구레한 사실들까지 알게 되었다. 일터에서 구는 어떤 모습이고, 왜 그 일을 하게 되었고, 어떤 보람을 느끼고 어떤 부당함을 겪고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나는 구가 겪는 부당함에 분노하다 못해 집에서 혼자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그러면서 내가 구를 어느 정도 아끼는지 스스로 확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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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warosa’: why Koreans are working themselves to death
‘Gwarosa’(과로사) : 한국인들은 왜 목숨을 걸고 일하는가
해외 매체들이 과로사를 그대로 ‘Gwarosa’라고 표기한 뉴스를 보도한 적이 있다. 해외라고 과로로 인한 사망자가 없는 건 아니지만, ‘과로사’라는 단어와 개념이 있을 정도는 아닌 모양이었다. Gwarosa는 인권 침해의 한 사례로 2018년에 소개되었다. 그리고 2023년, 한국의 주 69시간 근로제가 호주의 언론사에서 다뤄지며 다시 한번 ‘Kwarosa’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주 4일제, 주 4.5일제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던 시기가 잠깐 있었다. 그 논의는 어느 순간 사라지고 주 69시간 근무제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속이 답답해서 심호흡을 해야 했다. 해당 개편안을 추진하고 있는 대통령은 후보 시절 ‘주 120시간’ 노동 발언으로 논란이 된 적 있다. 일주일에 120시간을 일한다는 건 주 5일 근무를 한다면 5일 동안 1초도 쉴 수 없다는 것이고 주 7일 근무를 한다면 매일매일 7시간만 자고 일을 해도 근무 시간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산업혁명 시대, 빨랫줄에 걸려 잠들던 노동자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근로 시간이 개편된다면 스케줄 근무를 하는 구는 그 법의 영향을 많이 받을 터였다. 나는 근로 시간 개편안이 통과되어 매일매일 회사에 12시간씩 붙잡혀 있을 구를 상상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한국인들은 왜 목숨을 걸고 일하는가. 정부가 왜 적극적으로 노동자를 죽이는가. 모국어가 아닌 언어의 물음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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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평화롭게 흘러가던 나의 일터에도 폭탄이 떨어졌다. 출근 준비에 한창이던 주말, 회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우리 팀이 없어질 예정이니 월요일까지만 출근하면 될 것 같다고.
처음 겪어보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심한 충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더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가장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 것은 역시 잔고였다. 얼른 일자리 알아봐야지, 어휴 요즘 일자리 왜 이렇게 없니. 슬슬 조급해지던 차에, 사수로부터 우리가 실업급여를 받을 수도 있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방송작가는 원래 실업급여 대상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예술인 고용보험이라는 게 생기면서, 이제는 실업급여를 받을 수도 있겠다는 소식이었다.
내가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을지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지만, 아주 작은 빛을 보았던 것도 같다. 상품권으로 막내 작가 급여를 지급하던 문화가 사라지고,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예술인 고용보험이 생긴 것까지. 치열하게 싸운 누군가 덕분에 나의 일터는 어떤 면에서 한 걸음 나아갔다.
우리 중 대부분은 여전히 하루의 1/3 이상을 일터에서 보낸다. ‘가짜 삶’이라고, 없는 시간이라고 여기기엔 우리의 삶에서 일은 너무 큰 면적을 차지한다. 각자의 삶이 정원이라면, 일은 정원을 제멋대로 해치는 해충이 아닌 정원을 더욱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 도구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가 일에게 삶을 뺏기는 게 아니라 일이 우리의 삶을 잘 굴러가게 하는 요소가 되었으면 한다. 일주일 중 6일 동안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일해야 하루 사랑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일하고-사랑을 하는, 우리가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리듬을 나는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