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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래 Jun 30. 2023

헤어지는 날

그날은 1년간 몸담았던 프로그램의 마지막 회가 방송되는 날이었다. 나는 구의 집에서 구가 퇴근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애인의 집에 혼자 남아 일 나간 애인을 기다리는 시간이 평화롭게 느껴지던 날도 있었는데. 이날은 공허함을 견디기 어려웠다. 직장도 소속도 없다는 불안감 때문이었겠지. 빨래를 말리기 위해 켜둔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윙윙 들렸다.


구의 집에 혼자 남게 될 때면, 이 집에 오갔을 다른 사람들을 상상했다. 나는 머릿속 카메라로 몇 년 간의 구의 집을 촬영해보았다. 하루 동안 하나의 카페를 오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더 테이블> 처럼. 

그렇게 녹화한 영상을 배속으로 재생하면, 구의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전 애인들이 빠른 속도로 들락날락거린다. 카메라에 구의 전 여자친구들이 잡힐 때면 나는 조금 더 집중한다. 유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멈출 수 없다. 그들은 구와 밥을 먹기도 하고 TV를 보기도 하고 마냥 누워 있기도 한다. 때로는 그들의 생김새, 걸음걸이, 목소리까지도 상상해본다. 내가 겪었거나, 구로부터 전해 들었던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말이다.


이야기 1.

구의 집에 처음 놀러 갔던 날이었다. 같이 식탁에 앉아 초밥을 먹고 있는데 구의 휴대폰이 울렸다. 낯선 이름이 화면에 떠 있었다. 

이름 석 자일 뿐이었는데, 왜인지 느낌이 묘해 물었다. 전여친이야? 대답을 머뭇거리는 구에게 나는 그냥 전화를 받으라고 했다. 전화가 연결된 구의 핸드폰에서 상대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전에 나는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침대에 누워서 이 침대에 몇 명이나 누웠을까, 셈을 해보고 있는데 그새 전화를 끊은 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날 이후로 그 사람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나는 그게 이상하게 불편했다. 구의 현 애인으로서 권력을 남용할 것 같다는 찝찝함 때문이었다. 그런 동시에 '애초에 전화 올 일을 안 만들었으면 됐잖아' 하며 억울하기도 했고, '구가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하며 이해가 되기도 했다. 마음에 이는 혼란을 정리해보려 했지만 노력하면 할수록 헛수고로 돌아갔다.

구와 두 달 전까지 연애했던 그 사람을 머릿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빚어보았다. 내가 그 자리에 없었다면 둘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헤어진 지 두 달 된 사이에는 어떤 이야기가 오갈까?


이야기 2.

나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시절의 구를 궁금해했다. 그래서인지 구의 예전 사진들을 구경하는 시간이 좋았다. 그중에서도 유독 구의 예쁜 구석들이 잘 담긴 사진들이 있었다. 주로 2019년에 찍힌 사진이었다. 그랬다. 구가 2019년에 사귀었던 여자친구는 사진을 잘 찍었다. 그 안에서 구는 깊은 애정이 느껴지는 눈빛으로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마주한 그 눈이 바라보는 건 내가 아니라는 걸 단번에 느꼈다. 

이렇게 좋아죽던 사람하고는 왜 헤어진 걸까? 그런데, 나는 전 여자친구들과 왜 헤어졌더라?


이야기 3.

구와 헤어지는 꿈을 며칠 연속으로 꿨다. 왜인지 나는 매달리는 역할이었다. 꿈속에서 구는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반면 나는 스티로폼처럼 가벼워서 구의 팔을 붙잡고도 팔랑팔랑 딸려갔다. 어디 가는데! 아 못 헤어지겠다니까! 구는 헤어지기 싫다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ㄲ ㅓ ... ㅈ ㅕ ...”

몇 년 전 우울감에 제대로 시달렸던 이후로 정신 건강 염려증이 생긴 나는 심리상담센터에 달려가 선생님을 붙들고 물었다. 

“선생님. 저 며칠 연속으로 여자친구와 헤어지는 악몽에 시달렸어요. 이 관계가 저에게 해로운 걸까요? 어떡하죠?!”

늘 진지한 표정을 유지하시던 상담사 선생님은, 안달이 나 조급한 나를 달래려는 듯, 인자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헤어지기 싫으니까 헤어지는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죠 ^^”

하핫. 나는 조금 머쓱해졌다.


*


예약 시간을 걸어둔 선풍기가 타다닥 소리를 내며 힘없이 회전을 멈췄다. 몸담았던 프로그램이 종영하게 된 건 아무래도 시청률 부진 때문인 것 같았다. 모두가 열심히 일하고 있던 날 통보받았다. 다음 주부터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날 저녁 우리 중 몇 명은 소리 내서 울었다.

마지막 회 방송이 시작될 즈음, 구가 퇴근을 했다. 구는 옷을 갈아입으며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출연자들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능청스럽게 떠들었다. 그들의 표정에선 이별의 기색을 조금도 엿볼 수 없었다. 그러다 돌연, MC가 짐짓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프로그램의 종영 사실을 밝혔다. 그의 말에 따라 패널들도 차례로 마지막 인사를 했다. 이어서 지금까지 사랑해주신 시청자분들께 감사하다는 자막과, 슬픈 음조의 음악이 깔렸다.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눈앞에 펼쳐졌다. 내가 겪었던 날벼락 같은 이별들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나는 조금 슬프다고 말했다. 구는 자신도 그렇다고 했다. 

분위기를 전환하고 싶어서 장난스럽게 노래를 불렀다. “사랑이 떠나가~네~♪” 그렇다면 떠나간 사랑은, 내가 겪은 이별들은, 다 어디로 가는 건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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