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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래 Sep 14. 2021

화장실에 갇혀서 한 생각들

오후에 하는 샤워는 시작 전부터 상쾌하다. 그날이 휴일이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여느 휴일과 같이 나는 한 톨의 의심 없이 기분 좋게 수건과 옷가지를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집에 혼자만 있었다면 수건만 챙겨 들어갔겠지만, 엄마도 있었기 때문에 예의상 옷가지들도 챙겨 들어갔다. 화장실에 들어와 문고리 버튼을 눌러 잠그는데, 잠금장치가 뻐근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낡아서 그런가 보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샤워를 했다.

샤워를 마친 후 물기를 꼼꼼히 닦은 후, 옷을 챙겨 입고, 문고리를 돌렸는데, 돌아가지를 않았다. 어어 이거 왜 이래. 문고리를 살살 돌려도 보고, 거칠게 꺾어도 보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화장실에 갇힌 것이었다.

결국 문을 쾅쾅 치며 엄마를 불렀다. 엄마! 나 갇혔어! 후다닥 달려온 엄마가 바깥에서 문고리를 돌려보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지만 문고리는 계속 헛 돌뿐이었다. 엄마는 문을 의미 없이 흔들어 보기도 했고, 문틈으로 뭔가를 넣어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문은 미동도 없었다.     


사람을 불러야겠어. 엄마는 열쇠업체에 연락해본다며 잠시 자리를 떴다. 나는 변기 위에 털썩 앉았다. 땀이 난 건지 습기 때문인지 온몸이 축축했다. 엄마가 전화를 끊고 와 곧 수리공이 올 거라고 말해주었다. 알았어, 엄마도 좀 쉬고 있어. 우리는 수리공을 기다리며 잠시 휴식했다.

옷을 챙겨 들어와 다행이었다. 옷이 없었다면 수리공을 불러도 곤란, 안 불러도 곤란한 상황이 될 뻔했다. 앞으로도 옷을 꼭 챙겨서 들어오거나, 혼자일 때는 그냥 문을 살짝 열어놓고 씻어야지…. 보통 습관이란 건 오랜 시간에 거쳐 만들어지는데, 이렇게 습관 하나가 뚝딱 만들어질 때도 있구나 싶었다.

변기에 오래 앉아 있는 건 생각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목, 어깨, 허리를 돌리며 몸을 풀었다. 스트레칭을 할 때 몸에서 뚜둑뚜둑 소리가 나는 건 좋지 않다고 하던데, 시원한 느낌이 들어 난감했다.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본 화장실의 이곳저곳은 꽤 낡아 있었다. 이 집의 역대 집주인들은 인테리어에 관심이 없었나 보다. 전세 줄 집이라고 저렴한 자재들만 사용한 것 같았다. 하지만 언젠가 생길 자신 명의의 집을 꾸미기 위해서는 저축을 해둬야 한다며 굳이 돈을 들여 고치지는 않았다. 엄마가 꿈꾸는 그 미래가 빨리 현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초인종 소리가 울리고 엄마가 문을 열어주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는 목소리를 들어보니 수리공은 역시나 남자였다. 여자 수리공이 오면 어떤 느낌일까? 며칠 전 여자 배달원이 짜장면을 배달해주러 왔을 때, 나는 예상치 못한 얼굴에 당황스러운 마음도 잠시 반갑고 들뜬 마음으로 결제를 했었다.

빛바랜 금속 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문고리가 철컥거리며 돌아갔다. 어이구 이거…. 수리공이 중얼거렸다. 수리공은 우당탕거리며 장비를 꺼내는 듯했다. 별이(작고 나이 많은 강아지)가 놀라지는 않았을지 걱정이 됐다. 그 후로도 수리공은 요란하게 문을 건드렸다. 하지만 5분, 10분, 15분이 지나도 문을 열리지 않았다. 슬슬 피곤하고 답답하고 조급해졌다. 하지만 침착하게, 문고리가 덜컹거리는 영상을 찍어 인스타에 올렸다. 어쩔 수 없는 SNS 중독자였다.


수리공은 문고리를 아예 떼야할 것 같다며 엄마에게 괜찮겠냐고 동의를 구했다. 엄마는 얼른 떼어달라고 대답했다. 새 문고리를 달게 되겠구나. 낡은 화장실에 너무 세련된 문고리를 달면 이상하려나? 난 휴대폰으로 예쁜 문고리들을 검색해보았다. 몇 분 후, 수리공이 문에서 떨어져 있으라고 했다. 한 반짝 물러서니, 문고리가 덜렁거리다가 툭하고 둔탁하게 떨어졌다.

드디어 나가는구나!

…아니었다. 여전히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문고리가 있던 자리에는 문고리 크기의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그래도 그 구멍을 통해 바깥쪽이 보이니 답답함이 덜했다. 수리공이 또 다른 장비를 찾아 가방을 뒤적이는 게 보였다. 체념하고 도로 변기에 앉는데, 구멍 사이로 엄마의 손가락이 꼬물거리며 들어왔다. 

다래야 괜찮아?

응 괜찮아. 꼭 손가락이 말하는 것 같네.

약속을 의미하는 동작처럼, 엄마와 나는 각자의 새끼손가락을 갈고리 모양으로 만들어 구멍 사이로 잠시 걸고 있었다. 다시 수리공이 다가왔고 엄마와 나는 문 쪽에서 비켜났다. 시간을 보니 화장실에 갇힌 지 30분 정도 된 시점이었다. 이렇게 길어지다니, 만약 집에 혼자였는데 이렇게 갇혀버리고, 밖에 불이 났으면 어떻게 했어야 할까? 여기는 창문도 없는데. 문을 부수고 탈출할 수 있을까? 어느덧 화장실에서의 공상은 나를 재난 영화의 주인공으로까지 만들고 있었다. 바닥을 깨부수고 아랫집으로 착지해서 탈출해야 하나? 근데 그게 가능한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화장실에 망치를 둬야 할까. 그런데 만약 아랫집에서 불이 나서 화염이 위로 번지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럼 변기 위로 올라가 천장을 깨고 윗집으로 점프해서 탈출해야 하나? …그러기엔 아무래도 내 코어 힘이 부족할 것 같다. 역시 상승보다 추락이 훨씬 쉽다. 강아지를 어떻게 데리고 나가야 할지는 의식적으로 상상하지 않았다. 위기 상황에 놓인 별이를 그려보는 건 상상이라도 괴롭다. 이 모든 상상은 엄마랑 별이가 산책 나갔을 때 불이 났다는 가정 하에 이루어졌다. 

꼬르륵…. 알람 소리에 눈이 뜨이듯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상상이 꼬르륵 소리에 멈추었다. 오늘 내에 못 나가면 밥은 어떡하지. 엄마가 문고리 구멍으로 한 숟갈씩 밥 떠주면 웃기겠다.     


문 밀 테니까 비켜 계셔요. 수리공의 목소리에 나는 변기에서 일어나 다시 물러섰다. 문이 덜컹대더니 굉음을 내며 열렸다. 드디어 화장실을 탈출한 나는 과장된 곡소리를 내며 거실로 걸어 나왔고, 엄마는 눈빛으로 괜찮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에 장비를 집어넣고 있던 수리공은 내 예상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고, 많이 지쳐 보였다. 기운 없이 느릿느릿 장비를 챙기는 수리공에게 엄마가 계좌번호를 물었고 수리공은 벌떡 일어나 친절하게 계좌번호를 읊어주었다. 신한은행 일, 일, 공… 아니 구 아니고 공. 나는 정산에 여념이 없는 엄마와 수리공을 지나쳐 소파에 털썩 누웠다. 돈을 받은 수리공은 떠났고, 엄마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고맙다는 말을 한 후 현관문을 닫았다. 갑자기 조용해진 공기를 가르고 엄마가 내 머리맡에 와 앉았는데, 습한 공기가 훅 끼쳤다. 엄마도 화장실 바깥에서 꽤나 식은땀을 흘렸던 걸까. 아직은 혼자 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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