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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래 Nov 26. 2021

사랑은 잴 수 없는 것

사랑은 뭘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리려는 것은 나의 오랜 습관이자 번번이 실패하고 마는 도전이다. 고등학생 때는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안 보던 로맨스 영화들까지 열심히 찾아보았다. 영화 한 편을 볼 때마다 ‘사랑은 무엇이다’라고 한 줄 정리를 해보았는데, 그 문장들은 하나하나 제각각이었다.

<그녀> : 사랑은 소유욕이다.

<이터널 선샤인> : 사랑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 사랑은 함께 발전하는 것이다.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 : 사랑은 즐거운 이벤트다.

<첨밀밀> : 사랑은 상대방이 웃을 수 있도록 애쓰는 것이다.     


이 작업을 멈춘 것은 스무 살의 어느 날이었다. 갓 20살이 된 나는 그간 억눌러왔던 욕구들을 매일매일 분출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인터넷 커뮤니티나 어플을 통해 낯선 사람을 만나고, 술을 마시고, 레즈비언 클럽을 가기는. 청소년이었던 내가 꿈꿨던 일상이었다. 

그런데 사실 어렸을 때의 내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것은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도, 음주도, 클럽행도, 연애도 아닌 커밍아웃이었다. 학창 시절에는 결국 이루지 못 했던, 하지만 스무 살이 되었으니 꼭 해내고 싶었던 그 숙원 사업- 커밍아웃. 스무 살이 되자마자 친구들에게 고백하려 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어느 새 한 해의 반 이상이 지나고 있었다.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어! 나는 고등학교 동창들에게 여자친구의 존재를 밝히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막상 하려니, 여간 떨리는 게 아니었다.

아무래도 고백 연습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폰 연락처를 뒤지며 적당한 실험 상대를 물색했다. 나와 친하지 않고, 갑자기 이런 얘기를 들어도 아무렇지 않고, 어디에도 소문을 내지 않을 사람.

그런 사람은 없었다. 아직은 때가 아닌가 봐. 휴대폰 화면을 끄고 눈을 감아버렸다.     


3월엔가, 친구 둘과 술집에 갔다. 높은 파티션이 좌석들을 하나하나 에워싼 구조의 술집이었다. 각자 맥주를 시켜 이제 막 한 입 씩 마셨는데, 파티션 너머로 웬 남자들이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그중 한 명이 테이블 쪽으로 다가와 함께 술을 마시자고 했다. 이런 게 헌팅이구나… 생각하며 친구들 눈치를 살폈는데, 둘 다 은근히 웃고 있는 게 남자들이 마음에 든 눈치였다. 한 친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그들은 몸을 들이밀며 냉큼 우리 의자에 앉았다. 그렇게 사람 여섯이 4인석에 다닥다닥 붙어 앉았다.

취하면 답답함이 가실 줄 알았는데, 아무리 술을 마셔 봐도 구겨진 채 앉아 있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다. 한숨을 한 번 쉰 다음, 신나게 떠드는 옆자리 남자에게 비켜달라고 말하고 벌떡 일어났다. 어디 가냐는 친구들의 말에 “바람 쐬고 올게”라고 답하고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술집을 나오니 초봄의 찬바람이 밀려들어 다시 기분이 조금씩 좋아졌다. 옆에서 풍겨 오는 담배 연기를 피해 자리를 옮기려는데, 술집 문이 다시 열렸다. 문을 열고 나온 건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였다. 나를 보고 웃길래 먼저 말을 걸었다.

“왜 나오셨어요?”

“혼자 나가니까 걱정돼서요.”

“아하.”

낯선 남자가 어색한 호의를 베풀던 바로 그 순간, 지금이 커밍아웃 연습을 할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후우우우… 심호흡을 하고 남자를 불렀다.

“오빠.”

“네?”

“저 여자 좋아해요.”

“…?”

남자가 삐거덕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표정이 얼빵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니까, 레즈비언…?”

남자는 천기를 누설이라도 하는 것처럼 레즈비언이라는 단어를 속삭여 발음했다. 나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러면 다래 씨는… 어…….”

남자는 말을 길게 늘이며 다음 말을 고심하는 듯하더니, 결국…

“여자가 남자로 보이는 거예요?”

내 인생에 길이 남을 헛소리를 하고야 말았다.      


이게 뭔 소리지? 아마 그때 내 얼굴도, 방금 전의 뜬금없는 고백을 당한 남자의 얼굴과 같이 얼빵해졌을 것이다. 남자가 어떤 의도로 그 말을 했는지 이해하는 데에는 10초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정적이 민망했는지 남자가 다시 물어왔다.

“그니까 여자를 이성적으로 사랑한다고 하신 거 아니에요…?”

동성적으로 사랑하는데요?라고 대꾸해 봤자 알아듣지 못할 것 같았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젠 그냥 상황을 적당히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하하 네 뭐 비슷해요.”     


술이 다 깨버린 나는 집에 오는 택시에서 휴대폰 메모장을 켜 이 재밌는 이야기를 일기장 페이지에 기록했다. 혼자 키득거리며 일기를 쓰는데, 어느 순간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웃음기가 싸악 가셨다.

이게 나만 웃긴 거면 어떡하지. 레즈비언은 ‘남자 같은 여자’와 ‘여자를 남자로 보는 여자’가 사귀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남자. 그가 그냥 우스운 사람이 아니고 주류라면 어떡하지? 그때의 혼란함은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감정들이 혼재된 것이었다. 


그렇게 로맨스 영화를 보고 사랑을 탐구하던 작업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사랑에 대해 말이 한 마디도 통하지 않던 그 남자를 만나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이다. 모든 사람은 사랑을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 아무리 영화를 봐도 사랑에 대한 단 하나의 진리 같은 건 찾을 수 없을 거란 것.

게다가 나는 사랑의 중요한 성질 하나를 간과하고 있었다. 그간 내가 탐구했던 사랑은 로맨스 영화 속 남과 여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계에 편재돼있다는 것. 가족과 친구들을 보면 그들을 사랑한다고 느끼면서도, 역으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그들을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다.     


사랑을 정의하는 건 성공하지 못 한 미션으로 막을 내리게 됐지만, 그 이후로 나에게는 새로운 미션이 주어졌다. 사랑에 대해 내가 지닐 태도를 생각해보는 것이었다. 엄마와는, 친구들과는, 연인과는 어떤 사랑을 주고받을지 말이다.     


안생이 칠월을 사랑했듯, 숙희가 히데코를 사랑했듯, 나미가 춘화를 사랑했듯. 그러니까 치열하면서도 진취적이고 애틋한 사랑을 나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사랑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진다는 것, 어렵고 성가신 일이다. 하지만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복잡하고도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나만의 정의를 어설프게나마 내놓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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