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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승규 Jun 29. 2021

책과 음악 사랑으로 이겨낸 유복자의 연좌제

정문각 김시동 회장의 인생보

삶은 그림이다.

저마다 독특한 색깔로 그린다. 한 폭의 도화지에 그릴 수도 있지만 부족하기 일쑤이다. 연필로 수차례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밑그림을  만든다. 빨강 파랑 노랑 색칠로 완성도를 높여보지만 밑그림의 기백을 살려내기가 만만찮다.  덧 칠을 반복해도 끝내 만족할 수 없다.  도화지를 넘긴다.  

새로운 그림을 그리며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호흡이 다소 짧아지며 그만큼 속도가 빨라진다.  그림 만들기가 반복되지만 만족할 만한 창작품은 나오지 않는다. 이때 반전이 일어난다.  어느덧 한 권의 그림책으로 묶고 나니 그럴듯하다.


인생은 그림책이다.

인생보는 인생 단계마다 그려진 그림들의 엮음이다. 100명의 삶이 펼쳐지면 한 편의 드라마이고 100만 명을 넘어서면 삼국지, 초한지를 뛰어넘는 감동의 파노나마이다. 그리는 소재와  캔버스도 변한다. 도화지, 유화, 영상, 가상공간까지 등장하면서 시공을 초월한다. 블록체인, 메타버스,  NFT의 도움으로 타임머신, 타임캡슐을 타고 과거와 미래를 넘나 드는 입체 그림책이다.


2년 전 김시동 회장의 출판 기념회에 초대받았다.  

중소기업으로 성공한 사업가의 조촐한 고희연 자리이지만 처음 얼굴을 드러낸 자서전이 눈에 띈다.

'책과 음악에 심은 사랑'

가족과 지인들의 축사를 귓전에 맡겨둔 채 두 눈망울은 빠르게 인생 삼매경에 빠진다. 화보와 시, 여행기, 편지, 수필 등으로 그려낸 스펙터클 파노라마이다.


올해 초부터 장년들의 놀이터 '시니어 캔버스'를 구상해 왔다. 그 첫 번째 무대로 '인생보'를 준비하면서 김시동 회장을 떠올렸다. 대뜸 전화하고 대흥동의 사무실로 찾아간다. 6월 16일 오후 4시 후배들의 촬영 도움으로 김 회장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었다.

김시동은 산세가 수려하고 선비 정신이 깃든 예절의 고장, 봉화 출신이다.

아버지가 결혼 후 사범학교에 진학한 가난 한  양반집 가계이다. 어린 김시동의 불행은 그 출신 성분에서 시작된다. 사범학교를 다니던 아버지는 진보 이념을 선택한다. 뱃속에 태동한 김시동이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추후 할아버지가 전해준 원인은 '가난'이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는 그렇게 가족을 버리고 사상을 쫓아 어딘가로 떠났다. 남겨진 유산은 평생 지고 살아야 할  '이념의 멍에' 뿐이다. '행방불명'이라는 법률적, 시대적 호적 정리는 김시동에게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념(Ideology) 유복자'의 굴레를 덧씌운다. 생명이 잉태된 지 3개월 만이고 김시동의 삶은 태생부터 '연좌제' 덫에 걸린다.

성장기 김시동의 도화지는  가난과 외로움으로 가득 찬다. 학교 점심시간에도, 소풍 갈 때도 따뜻한 도시락보다는 눈물을 훔칠 수밖에 없는 차가운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아버지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데 학교와 집 주변을 서성이는 것은 그 그림자를 추적하는 경찰과 주변의 따가운 시선뿐이다.

가난과 외로움을 훨훨 털어버리고 하늘로 날고 싶었다. 때마침 개봉된 영화 '빨간 마후라'는 수학 공부 잘하는 고등학생 김시동의 꿈을 자극한다. 그러나 그 꿈은 결코 시도해서도, 실현할 수도 없는 먼 나라 소재였다. 연좌제 김시동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헛된 꿈임을 자각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청년 김시동이  선택할 수 있는 외통수는 가난 및 외로움과 정면 승부하는 현실 도전이었다. 화력발전소에서 막노동으로 1년 동안 일하며 학자금을 벌었다. 하늘을 날지 못한다면 땅에서 뛰어야 했다.  주경야독으로 점철된 영주 전문대학 생활 2년은 꿈의 엔진을 다시 설계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반전은 회사 생활에서 시작된다.

대한민국 근대 성장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던 시절인 만큼, 대기업에서 출발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단거리 질주보다는 장거리 마라톤을 계획했다. 가난을 벗어나려면 사업을 해야 했고 그  창업의 길을 중소기업에서 온 몸으로 배우고자 했다.

청년 예비 창업가 김시동의 선택은 출판업이었다.

모든 인생에 반전 드라마가 준비된 것은 아니다. 죽고 살기로 노력해도 행운의 여신으로부터 외면당하기 일쑤이다. 그러나 직장인 김시동에게 '의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는 김시동 사원을 고용주 사장은 눈여겨본다.  정직함과 성실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에게 보여주려는 가식과는 분명 구별되었을 것이다. 근대화 성장의 큰 물결 속에서 한 개인의 성장 도화지도 아름다운 채색이 물결치기 시작했다.


인생길의 또 다른 성공 요건은 투자이다. 자신의 전 자산을 투자하는 벼랑 끝 전술은 사업 승패의 갈림길로 회자되곤 한다. 물러날 곳이 없는 만큼, 모든 에너지를 동원해야 하고 성공 가능성은 그만큼 배가된다.  사업가 김시동의 투자 물은 자신의 집과 열정이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지하 셋방으로 내 몰고 그 전세금으로 투자한 출판사는 얼마 가지 않아 노다지로 바뀌었다. 쏟아지는 돈을 세다가 지난날 가난의 추억이 되살아 날 땐, 돈과 눈물이 뒤범벅되기도 했다. 사업가 김시동의 분신인 의학전문서적 출판사 정문각은 그렇게 한 페이지씩 희망의 그림을 축적해 나갔다.

유복자 연좌제의 아픔을 자식들에게는 대를 물려주지 않겠다던 중년 김시동에게 또 한차례 시련이 다가온다.

대학 입시를 앞둔 큰 아들이 어느 날 공군사관학교에 진학하겠다고 밝혔을 때 김시동의 하늘은 노랗게 변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연좌제 고리가 약해졌다 하더라도 공정한 경쟁이 보장될 수 있을까? 스스로 내린 대답은 'No'였다. 아들을 설득하기로 했다. 가슴으로는 울음을 참아내면서 아들의 이성에 호소했다. 당시 세계 경제 패러다임을 바꾸기 시작한 전자공학을 추천하기도 하고 의학 서적 출판업에서 수없이 접하던 의료 박애 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아들은 현명했다. 그리고 의대 진학을 선택하여 현재 전문의로서 활동 중이다. 내 가족에게 닥친 과거, 현재, 미래의 도화지에서 미래를 선택한 결과이다.


김시동 회장의 인생보는 어머니에서 절정을 이룬다.

아비 없는 아들 하나 만에 의지하여 평생 독수공방을 지켜온 어머니는 당연히 김시동 인생 그림책의 첫 페이지이자 마지막 페이지였다. 그런 어머니가 갑자기 2002년 1월 25일 세상을 등진다. 충격 그 자체였다. 장년의 김시동은 그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지 못했다. 그 절망의 환경을 이겨낸 어머니의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원망, 분노일까? 아니면 아들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과 기대였을까?  그 어머니와 함께 그렸던 그림책이 여기서 끝난다면 나머지 내 인생은 무엇으로 그려야 할까?

인생은 반전 드라마의 연속이다. 어머니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어머니가 떠난 그 해에 마포 6차선 대로변에 회사 사옥 건물을 구입한다. 어머니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큰 아들은 좋은 배필을 만나 결혼식을 올린다.


어머니의 죽음은 장년의 김시동에게 또 다른 선물을 준다. 앞만 보고 뛰던 그의 삶에도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인지하게 한다.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하니 새 도화지가 펼쳐진다. 출판 사업은 막내아들에게 맡기고 과거와 미래의 시퀀스를 무시한 채 오직 삶의 가치를 찾아 넘나들기로 한다.

음악 재능이 많던 고등학생 김시동은 트롬본 악기를 연주하는 브라스 밴드 활동을 했다. 부드럽고 중후한 음색의 트롬본은  음정을 조정하고 모든 반음계를 연주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금관악기이다. 다만 협주용으로 적합하고 솔로 연주에는 음색이 부족한 게 단점이다.

김 회장은 인생 2막의 음악으로 색소폰을 선택했다. 원래 타고난 음악적 소질을 자부하던 데다 '삶의 연좌제'를 내려놓고 나니 음악은 어느새 일상의 삶과 일체가 된다. 가수협회에 정식 가수로도 등록했다.


색소폰 연주와 노래로 전국 봉사 활동에 나선다. 교도소, 군부대, 양로원, 요양원, 지자체의 경로잔치 등 음악으로 누군가를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는 자리라면 전국 팔도는 물론이고 해외까지 찾아 나선다. 그동안 위문 공연 횟수는 수백 차례가 넘는다. 봉사 활동 답례로 다양한 기관에서 받은 감사패는 사무실을 비좁게 한다. 지난해에는 마포구청으로부터 구민상을 받기도 했다. 모두 분에 넘치는 상들이지만 더 열심히 봉사하라는 채찍으로 받아들인다.

웰 라이빙은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계를 위한 일만으론 뭔가 부족하다. 그 결실의 1%를 좋아하는 스포츠, 취미, 기호 식품, 미용 등에 투자했더니 그 품격이 배가 된다. 김시동 회장의 웰 라이빙 비결이다.

김시동 회장의 웰빙(well being) 모습에서 웰다잉 문화 운동을 생각해 본다. 죽음을 잘 맞이 하는 것은 남은 인생을 더욱 뜻깊게 사는 것이다. 웰다잉(well dying)은 웰 라이빙(well living)의 또 다른 모습이고 이들은 웰빙(well being)의 두 얼굴이다.

https://youtu.be/_BctDvK44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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