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브 마이 카”에 대한 단상
*작품 특성상 기승전결이 예측 가능하나 그럼에도 한 장면, 한 장면에 대한 몰입이 중요한 작품입니다.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신 분들은 본 비평을 읽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배우이자 연출가로 활동하는 주인공 가후쿠는 각본가인 아내 오토가 있다. 오토는 섹스를 할 때 무의식 중에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습관이 있고, 가후쿠는 그 이야기가 끊기지 않게 도와주며 섹스가 끝난 후에 이야기를 정리해 오토에게 전달한다.
가후쿠는 영화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오토의 불륜을, 그것도 부부의 집 거실에서 섹스를 하는 오토를 목격한다. 그러나 그는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언제나처럼 행복한 부부생활을 연기한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는 것이 더 두려운 그가 기댈 곳은 환상밖에 없으므로. 지금 그의 모습이 거짓이라는 것은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현실이 선명할수록 환상에 매달리게 되므로.
그러나 환상을 현실처럼 즐긴 대가로 그는 환상의 결과를 현실에서 받아들이게 된다. 어느 날 오토가 할 이야기가 있다며 일찍 들어오라는 말에 가후쿠는 두려움에 일부러 밤늦게 귀가하고, 갑작스럽게 쓰러져 사망한 오토의 시체만을 발견한다. 그렇게 그는 그의 감정도, 그녀의 감정도, 그 누구의 진실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채 영영 그녀를 떠나보낸다. 그리고 그 책임은 현실에서 도피한 가후쿠의 손에 고스란히 남는다.
아내와의 사별 이후 “바냐 아저씨(안톤 체호프)”를 극으로 올리기 위해 준비해 나가는 가후쿠의 모습을 조명하며 “드라이브 마이 카”의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렇듯 “드라이브 마이 카”는 영화의 서막에서는 ‘이야기’를 통해, 본 내용에서는 ‘연극’이라는 허구를 도입하여 주제를 풀어나간다. 그런데 하필이면 “바냐 아저씨”의 주인공 바냐는 가후쿠와 너무나 닮은 존재이다. 심지어 가후쿠는 바냐 역을 항상 맡아온 배우이다. 이렇게 쉽고 뻔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려나 싶은 생각이 들 때, 가후쿠는 돌연 그 역할을 맡지 못하겠다며 연출가로만 남을 것을 선언한다. 그렇게 이 영화 속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가후쿠가 극 중 본인의 잘못을 직시하고 용서받는 바냐 역을 포기한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현실에서 환상으로 도망치는 행위는 애초에 ‘실재’와 ‘허구’가 구별되는 상황에서 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판단이다. 하지만 이미 현실을 거부한 가후쿠가 연극이라는 허구마저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은 그가 이미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잃었음을 상징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가후쿠의 구원은 그가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완전히 길을 잃은 그 시점에서 시작된다.
“체호프는 두려워. 그의 대사를 입에 올리면 나 자신이 끌려 나와. 못 느껴? 그걸 견딜 수 없게 됐어.”
“아무리 잘 안다고 생각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타인의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본다는 건 불가능한 얘깁니다. 하지만 나 자신의 마음이라면,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분명하게 들여다보일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나 자신의 마음과 솔직하게 타협하는 것 아닐까요? 진정으로 타인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나 자신을 깊숙이 정면으로 응시하는 수밖에 없어요.”
가후쿠가 연출하는 연극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언어 연극’이라는 점이다. 작중 핵심이 되는 극 “바냐 아저씨” 역시 일본인, 중국인, 심지어는 수어를 사용하는 한국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어우러져 완성된다. 그런데 가후쿠는 배우들에게 대사에서 감정을 제거할 것을 요구하며 음성 언어의 영역 밖의 무언가로 배우들이 교감하도록 지시한다.
가후쿠의 의도를 제일 먼저 알아차린 배우는 수어를 사용하는 유나. 그녀는 ‘나’를 내려놓았을 때 진정한 ‘너’를 발견할 수 있음을 깨닫고, 동료 배우 제니스와 비로소 진정한 공감을 이루는 데에 성공한다. 다언어 연극은 그렇게 서로 다른 세계의 만남이 너의 발견이, 그리고 결국 나의 발견이 되는 과정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 핵심은 불완전성에 있다. 내가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아도 내가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될 수는 없기에. 다만 서로가 상대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감정이, 그 마음이 온전히 전해질 수 있음을 함께 체험하는 것이다. 결국 음성 언어가 담아낼 수 있는 우리의 감정은, 우리의 진실은 전체의 일부 조각뿐인 것이다.
이처럼 “드라이브 마이 카”는 체호프의 연극을 빌려 무대를 만들고, 그 무대 자체를 아무 가감 없이 관객에게 비추는 영화이다. 그런데 작품 제목이 드러내듯 관객은 또 다른 무대를 마주하게 된다. 바로 가후쿠의 붉은 사브 안에서의 공간이다. 가후쿠에게 차는 집 이상으로 사적인 의미를 가지는 공간이다. 오토가 녹음한 연극의 대사를 매일 재생하며 극을 머릿속으로 스케치하는 그이기에. 그녀가 죽은 지 2년이 지난 시점에서 오토의 유일한 흔적 - 음성 언어 - 이 남아있는 공간이 바로 그의 붉은 사브 안이다.
이런 사적인 공간에 불청객, 미사키가 등장한다. 처음에 회사 측에서 기사를 고용해 준다는 말에 완강히 거절하던 가후쿠는 규정 상 어쩔 수 없다는 회사의 입장에 끝내 미사키를 드라이버로 받아들인다.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길을 잃은 가후쿠. 배우들에게 ‘나’를 비워 ‘너’와의 소통으로 나라는 존재를 찾을 것을 주문하지만, 정작 본인은 해답을 알면서도 끝내 도망치는 그는 사브 안이라는 그의 가장 사적인 공간에 미사키라는 타자를 받아들이면서 가후쿠 자신의 구원이 시작된다.
“때로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어요. 이 연습에 중요한 건 그런 거 아닌가요?”
“너무 세세해서 전해지지 않는… 두 분 다 그 부분을 중요하게 여기는 듯해요.”
“지금 뭔가가 일어났어.”
무대 위 “바냐 아저씨”의 바냐 역에서도, 오토와 섹스할 때 오토의 이야기에서도, 이제는 그의 곁을 떠난 오토의 녹음된 목소리를 차 안에서 들을 때도 가후쿠는 항상 묵묵히 수신자의 위치에서 발화를 듣기만 해 왔다. 진정한 소통을 하지 못한 채 자신의 목소리를 잃은 가후쿠가 “바냐 아저씨”의 상투적이고 보편적인 위로의 대사를 받아들이지 못할 수밖에 없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한편 누구나 인정하는 운전 솜씨를 지닌 미사키는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을 위해 운전을 한 적이 없다. 항상 타인의 목적만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외면하고 살아온 미사키. 그렇게 자기 자신으로부터, 용서받지 못할 과거로부터 쫓기듯 도망쳐 오기만 했던 두 남녀가 만나며 “드라이브 마이 카”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된다.
영화는 붉은 사브 안이라는 새로운 무대룰 빌려 가후쿠와 미사키에게 각자의 거울을 비추어 준다. 아직 스스로를 대면할 용기가 없는 이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네가 숨기고 있던 ‘너’를 발견함으로써 동일한 위치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한다. “바냐 아저씨”의 은유가 붉은 사브 안 남녀의 데칼코마니로 현실화되는 것이다.
결국 “드라이브 마이 카”는 가후쿠가 다시 바냐 아저씨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스스로 고개를 들어 자신의 상처를 직면하는 과정을 따라가는 이야기다. 가후쿠의 구원은 무대로 올라온 “바냐 아저씨”에서 모든 관객과 배우들이 숨죽여 보는 눈앞에 그가 유나에게 영화의 핵심과도 같은 대사를 들으며 완성된다. 영화 시작 부분부터 지금까지 몇 번이고 오토의 음성, 다른 배우들의 음성으로 반복된 대사이지만 그 상투적인 대사가 드디어 살아있는 무언가가 되어 가후쿠의, 영화 관객의 마음 한 켠을 움직이는 데에 성공한다. 기나긴 대사를 적막 속에서 유나가 수어로 표현함에도 그 어떤 장면보다 충만하게 느껴지는 것이 우연을 아닐 터이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감정이, 마음이, 시간과 경험이, 드디어 머무를 자리를 찾아 가후쿠의 마음에 안착한 것이다.
“내가 당신 아버지였다면 어깨를 안고 말해주고 싶어. ‘네 탓이 아니야’, ‘넌 잘못한 게 없어’라고. 하지만 말 못 하겠어. 넌 엄마를 죽이고, 난 아내를 죽였어”
“만나면 화를 내고 싶어. 책망하고 싶어. 나에게 계속 거짓말한 걸. 사과하고 싶어. 내가 귀를 기울이지 않은 걸. 내가 강하지 못했던 걸.”
“살아남은 자는 죽은 자를 계속 기억해. 어떤 형태로든. 그게 계속되지. 너와 나는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어. 살아가야 해. 괜찮아. 우린 틀림없이 괜찮을 거야.”
영화의 결말에서 미사키는 드디어 자기 자신을 위해 차를 운전한다. 영화의 제목에서처럼, 드라이브 ‘마이’ 카가 완성된 것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나’를 내려놓음으로써 발견되는 ‘너’, 그렇게 그들 모두의 삶을 어떠한 가치판단도 없이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나’의 삶을 반추하고, 끝내 완성되는 주체성의 발견을 다룬다. 삶은 예측 불가능하고, 나조차도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알지 못하는 감정이, 마음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불확실함 속에서도 우리가 내일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오히려 오늘의 세계가 내일은 바뀔 수 있는 그 불확실성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복잡하고도 확신이 없는 세계에서 나만의 길을 찾아 나의 걸음을 떼는 것, 그것이 우리네의 드라이브 마이 카가 될 것이다.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이 든 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이 오면 얌전히 죽는 거예요. 그리고 저세상에 가서 얘기해요. 우린 고통받았다고. 울었다고. 괴로웠다고요.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겠지요. 그리고 아저씨와 나는 밝고 훌륭하고 꿈과 같은 삶을 보게 되겠지요. 그러면 우린 기쁨에 넘쳐서 미소를 지으며, 지금 우리의 불행을 돌아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드디어 우린 평온을 얻게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