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플 그랜딘(2010)"과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2017)" 단상
채움은 비어있음을 전제로 하고, 우리는 가을의 낙화가 아니라 그마저도 떠나가고 순백의 상실만이 깔린 겨울의 침묵에 비로소 생명의 개화가 머지않았음을 깨닫는다. 개인의 삶은 죽음이라는 반대항을 내재하기에 죽음으로써 인간의 존재에 의미가 생기고 그 삶으로 죽음에도 의미가 생긴다. 그렇기에 “템플 그랜딘(2010)”과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2017)”를 뒤덮는 결핍과 죽음의 세계관은 생명의 태동으로 이어진다.
두 작품의 주인공인 템플과 마리아가 겪는 결핍은 영혼이라 불러도 좋을 법한, 마음과 교감의 영역이다. 자폐증은 작중 그들을 타자와의 관계, 그리고 관계에서의 정서적 감흥으로부터 철저하게 유리시키는 장치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런 마음의 결핍은 강렬한 신체성을 동반한다. 두 명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자신을 향한 뒷담화, 부정적 시선에는 정작 냉담하지만 애정이 담긴 타인의 손길 등 신체적 접촉만큼은 극단적으로 거부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신체성의 발현에 있어 템플과 마리아는 반대의 방향성을 보인다. 템플의 정신은 외부세계를 향하여 분출한다. 그녀의 시선은 늘 고정되어 있지 않아 위 아래로 흔들리며 이와 함께 자신의 얼굴이 움직이고, 곧 손짓과 다리가 따라 끊임없이 위치를 바꾼다. 산만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가만히 머무르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은 경쾌한 음악과 빈번한 장면의 전환으로 그 역동성이 한층 강조된다. 그런 템플과 반대로, 마리아는 정적이고 차분하다. 그녀의 시선은 템플처럼 상대의 눈을 향하지 못하지만 수평의 선 어딘가에 멈추어 고정되어 있으며, 식사를 하건 헤드폰을 착용해 음악을 감상하건 여하간의 행동을 할 때에도 불필요한 움직임 없이 곧은 자세를 유지한다. 잠을 청하기 위해 누운 침대에서도 목각 인형마냥 양손을 가지런히 배 위로 모아 고정시키는 마리아의 신체성은 직선으로 표상된다. 감독 또한 그녀의 신체를 항상 로우 앵글도, 하이 앵글도 아닌 수직의 각도를 유지하여 연출함으로써 그녀의 직선성을 강조한다.
이처럼 마음의 결여가 불러온 외부 자극에 대한 강렬한 감각적 반동(reaction)은 비자발성이 그 핵심이다. 자폐증 때문에 템플의 신체는 쉬지 않고 외부에서 움직이도록 강제되고, 마리아의 경직성은 드넓은 햇빛을 피해 좁은 그림자의 영역으로 그녀를 몰아넣는 등 스스로를 세계로부터 고립시키는 방향으로 압박한다. 그러므로 감당할 수 없는 자극 과잉의 상황에서, 템플은 압박 기계에 신체를 가두어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던 신체의 역동성을 제거함으로써 평온을 되찾는다. 압박 기계에 들어가 있을 때, 그 고독 속에서 템플은 비로소 눈을 감고 고개를 땅으로 향해 가만히 숙이며 어떠한 외부 자극도 느끼지 않고, 자신의 그림 기억도 나타날 필요가 없게 된다.
템플이 의도치 않은 활동성에서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고정된 자세를 취한다면, 마리아는 강박적인 수동성에 대항해 접촉을 의식적으로 늘림으로써 주체로 거듭난다. 그녀가 타자의 신체를 받아들이기 위한 일환으로 으깬 감자를 손가락 관절 하나하나 구부려 가며 느끼는 씬이 작중 어떤 장면보다도 생동감이 넘치게 느껴지는 까닭이 바로 그것이다. 마찬가지로 잔디 광장에 누워 있는 마리아는 일견 직선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으나, 스프링클러의 물이 사방에서 그녀를 흠뻑 적실 때 내리쬐는 햇볕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마리아는 환하게 웃는다.
한편 “템플 그랜딘”과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를 공통적으로 관통하는 또 다른 핵심 주제는 죽음이다. 템플과 마리아는 죽음을 알지 못한다. 정확히 말해 그들, 특히 템플은 확실하게도, 은 죽음이 생물학적으로 무엇인지는 설명할 수 있을 터이다. 하지만 죽음을 머리로 아는 그들은 가슴으로 눈물 한 방울 흘릴 수 없다. 애초에 도축되는 소를 매일같이 관찰해야 되는 일을 업으로 삼는 템플과 마리아에게 기계화된 죽음의 연쇄는 그들의 일상이고 곧 삶이다.
템플은 가족만큼 소중한 은사님의 죽음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한다. 그녀에게 감정은 허락된 것이 아니기에. 하지만 감정이 배제된 그녀는 소의 죽음에 인간의 죽음과 같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존재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템플이 생명의 가치를 존귀한 것으로 인식하고, 심지어는 은사님의 장례식에서 드디어 감정의 첫 물결을 느끼게 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다만 자신과 관련된 지인의 죽음에는 세상이 무너진 듯 울던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타인의 죽음에는 놀라울만큼 무신경하다. 하물며 그 대상이 인간이 아니라면 자신이 죽음을 부과하는 입장에서도 사람들은 계산적이고 냉혹하다. 이렇듯 감정은 위선적이고 기만적이다. 그래서 장례식장에서 유일하게 눈물을 흘리지도, 슬퍼하지도 못 하는 템플이 소들이 겁을 느끼지 않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도축 시스템을 개발해 낸다. 그녀는 이미 인간성의 상징인 직립을 포기하고 포복으로 소들과 눈을 마주치는 능동적 하강을 통해 존재 간 수평성을 긍정할 수 있는 주체였으므로.
이처럼 템플이 죽음의 방식을 결정하는 삶과 죽음의 기로에 위치해 있는 반면, 마리아는 죽음에 함량 지방으로 등급을 매겨야 하는 역할을 부여받아 오롯이 죽음의 영역 안에서만 존재한다. 그런데 도축 공장에서 평가의 대상은 죽은 소에 머무르지 않고 직원들의 일생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점심 메뉴가 맛있는지, 본인이 충분히 성적 매력이 있는지, 저 사람은 왜 타인과 교류하지 않고 혼자 틀어박혀 있는지 등. 그렇게 짐승과 인간의 경계가, 죽음과 삶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소 발정제 도난 사건이야말로 이를 상징하는 서사의 핵심이다. 하룻밤 유희를 위해 인간이 소 발정제를 무단으로 탈취한 일이 발생하는 공장에서 그 일이 내부 직원, 외부 경찰을 가리지 않고 농담의 소재로 전락할 때 안드레의 “소가 불쌍하지는 않은가”의 연민의 시선마저 궁색해진다. 아니,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에서 불쌍한 것은 인간이다. 죽은 소는 사후에 내려질 평가를 의식하지 않으나 산 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평가에 대해 두려워한다. 오직 죽음의 영역 안에 있는 마리아만이 이러한 불안으로부터 자유롭다.
결핍과 죽음에 대한 템플과 마리아의 차이는 궁극적으로 이들의 욕망의 방향을 결정짓는다. 템플은 소의 압박 기계를 통해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으므로 소들의 불안, 두려움을 덜어주면서도 효율적인 도축 시스템을 고안한다. 이는 근본적으로 자기지향적이며 자기 증명의 욕구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안드레를 갈구한다. 같은 꿈을 공유한다는 사실에서 느끼는 호기심은 필연적으로 ‘나’가 아닌 타자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그래서 마리아는 자신의 경직성과 수동성을 극복하고 죽음의 영역에서 빠져나오고자 온간힘을 다 해 안드레의 욕구를 맞추어 주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그 온몸의 노력 끝에서 안드레에게 거절당한 마리아가 돌아갈 수 있는 자리는 없다. 방향을 잃어버린 욕망은 겉잡은 수 없이 번져 그녀의 직선은 완전히 파괴되고, 관객은 욕조에 누워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마리아의 비스듬한 자세를 처음으로 목격한다. 신체의 아랫부분부터 몸을 훑듯이 그녀의 얼굴로 올라가는 카메라는 그녀가 수용하고자 노력해 온 외부의 자극을 따가울 정도로 드러내며, 좁은 욕조에 꽉 끼어 있는 마리아는 돌고 돌아 폐쇄된 공간에 갇혀버린 그녀의 신체성을 대변한다.
템플은 세상을 바꾸었지만 마리아는 ‘나’를 바꾸었고, 주체의 변화는 타자가 인식할 때에 온전해지는 것이기에 마리아의 구원 또한 자신을 망가뜨린 안드레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평생 전화기 없이 살아온 그녀가 처음 듣게 된 그 강렬한 청각 사운드가 마리아로 하여금 단숨에 욕조로부터 스스로 벗어나 달려가게 만드는 동인이 된다. 이제 방황하던 마음이 정확한 말을 만나 제 자리를 찾는다. 안드레의 집에서 재회한 마리아와 안드레는 너무 이른 마음과 너무 늦은 말이 마침내 두 명을 아우르는 그 무엇인가가 되어 둘은 같은 꿈을 꾸지 않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