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2022)"에 대한 단상
하루에 한 번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수평선을 경계로 영영 마주치지 않을 것만 같던 하늘과 땅을 저무는 해가 교차하는 그 순간.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 언제나 흘러갈 시간 속에서 노을의 주황이 바다의 파랑을 물들이는 그 순간에 우리는 평행선을 달려오던 마음이 함께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 순간은 찰나이기에 시리도록 아름답다.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2022)"은 방황하는 마음이 정확한 말을 만나 제 자리로 향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주인공 해준(박해일)은 아내가 있는 가장이자 형사이지만, 역시 남편이 있고 그 남편을 살해한 혐의를 받는 용의자 서래(탕웨이)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녀에게 묘한 끌림을 느낀다. 서래를 향한 의심과 관심 사이에 스스로의 마음을 확신하지 못하는 해준을 바라보는 서래는 꾸밈없이 자신을 해준 앞에 드러내고, 둘은 점차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서래는 해준의 용의선상에서 벗어나게 되고 해준은 보다 적극적으로 서래에게 본인의 호감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둘은 비 오는 날 외딴 절을 함께 방문하기도 하고, 서래는 부인과 따로 사는 해준의 집을 찾아가 그의 만성적인 불면증을 치유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해준과 서래 사이에는 첫 만남부터 좁히지 못하는 간극이 존재한다. 형사 신분의 해준과 용의자로 조사를 받던 서래. 한국인인 해준과 중국에서 넘어와 한국말이 서투른 서래. 각각 자신의 가정이 존재하는 해준과 서래. 그렇기에 두 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마음에 확신이 없고, 관심과 이끌림 쪽으로 기울어가는 마음에도 그 감정으로 서로에게 말로 표현하지 못하며, 표류하는 두 사람의 마음은 그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해준과 서래 사이에 맴돌 뿐이다. 결국 두 명의 관계는 해준이 그간 서래가 자신을 속여 왔으며 남편 살해 사건의 진범이었음을 발견해 내며 붕괴하고야 만다.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헤어질 결심(2022)"의 2막이 펼쳐지는 가상의 마을인 경상북도 이포군은 언제나 안개로 자욱하게 덮인 마을이다. 서래와의 일로 심신이 피폐해진 해준은 아내와 함께 지내며 다양한 방법으로 불면증을 해소하려 하지만 차도 없이 지낼 뿐이다. 그런 해준 앞에서 서래가 다시 나타난다. 새로운 남편과 함께.
불편한 재회의 다음 날, 공교롭게도 다시 한 번 서래의 남편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번에 해준은 서래를 범인으로 확신하며 철저히 선을 그어가며 조사를 하지만, 끝내 발견된 진실은 전혀 다른 인물이 저지른 범행이라는 점과 서래는 오히려 자신과의 일을 숨겨주기 위해 뒤에서 도와주었다는 것. 그렇게 해준은 다시 한 번 흔들린다.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헤어질 결심"의 두 주인공 사이의 거리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는 음성 언어이다. 한국말이 서투른 서래는 드라마, 그중에서도 사극을 통해 각종 표현들을 외워 소통하고, 그마저도 충분치 않을 때에는 핸드폰의 번역기를 통해 해준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한다. 그래서 해준과 서래의 관계에는 필연적으로 타자의 존재가 전제되어 오롯한 소통을 지연시킨다.
이 지점에서 해준이 작중 스마트워치에 녹음으로 남기는 음성 파일은 정반대의 역할을 수행한다. 1막의 결말에서 서래가 본인의 범행을 숨기기 위해 해준이 그간 그녀에 대한 남긴 음성 녹음들을 지운 것을 발견하며 둘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 상황을 몰래 녹음한 서래의 음성 파일은 서래가 해준의 마음을, 결국에는 해준이 자신의 마음을 확신하게 해 주는 핵심적인 단초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이성적 판단도, 외부의 개입도 없이 그 상황에서 발현되는 본인의 마음이 여과 없이 녹음된 해준의 음성 녹음. 서래가 언어로 표현된 것 그 이상의 해준의 정확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던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당신이 나한테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그렇게 자신의 정확한 마음을 깨달은 해준과 서래가 영화의 결말에서 같은 장소에서 다시 모이지만 재회하지 못하는 서사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산보다는 바다를 좋아한 해준과 서래는 안개로 둘러싸인 이포를 벗어나 각자의 결심을 이루기 위해 어느 한 해변으로 향한다. 서래는 1막의 사건 이후 해준과 헤어질 결심을 하였지만 그것이 본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아니었음을 깨닫고 평생 해준의 '미결 사건'으로 남기 위해 자신의 자살마저 실종으로 둔갑시키는 한편, 해준은 드디어 서래에 대한 본인의 사랑을 확신하여 운동화 끊을 고쳐 매고 서래를 찾아 나선다.
노을이 지는 어느 한 해변에서 너무 이른 마음과 너무 늦은 말이 마침내 두 명을 아우르는 그 무엇인가가 되어 제 자리를 찾은 것이다.
마침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