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서 3번째 신입이 되었다
얼마 전 모 회사에 마케터로 입사하게 되었다. 지난 5년 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말 그대로 또 다른 신입 생활이다.
커리어의 시작은 유통회사 바이어였다. 전국에 있는 매장과 온라인몰에 있는 특정 카테고리의 상품을 담당하는 직무였다. 첫 회사생활이었기에 어설프고 두렵기 짝이 없었다. 그 당시에는 뭐랄까,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퇴사를 꿈꾸었고 관련해서 책도 한 권 냈다. 3년 간 3개의 팀을 전전하다가 결국 사직서를 제출했다.
퇴사를 하고 호캉스나 해보자며 호텔 방에 앉아 스파클링 와인잔을 비우고 있을 무렵, 운명처럼 채용 공고가 올라왔다. 평소같이 일해보고 싶었던 대표님이 에디터를 뽑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퇴사를 하고 2주 만에 다시 입사를 하게 되었다. 의도치 않았지만 다른 업계로 이직한 셈이다. 이번에는 스타트업의 에디터로 방향을 틀었다.
처음 들어갔을 때에는 두세 평 남짓한 공유 사무실에 대표님과 팀장님이 앉아있었다. 나름 대기업에서 일하다가 확연히 줄어든 공간과 인원을 보니 스타트업에 입사하긴 했구나 하고, 가만히 곱씹었다. 전 회사가 시키는 대로 실수 없이 일하는 걸 중시했다면, 이곳은 최소한의 가이드라인만 주고 스스로 찾아서 업무를 해야 하는 조직이었다.
지근거리에서 회사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무실도 더 큰 곳으로 이전했고, 인원도 늘어났다. 매출과 계약 건수도 상승세였다. 이곳을 마지막 회사로 삼아도 좋지 않을까, 잠시 생각했다. 근무 시간도 좋았고, 사람들도 편하고, 일도 손에 익었으니까. 그러다 문득 내가 멈춰있다는 불안감이 닥쳐왔다. 받은 프로젝트에 따라 조금씩 디테일은 달랐지만 결국엔 비슷한 일의 반복이었다. 조직이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었으니 당연한 수순이긴 했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전 회사에서 나왔던 이유를 떠올려보았다. 회사 외에는 다음 길이 보이지 않아서였다. 회사는 직원의 행복이나 자아실현이 아니라 이윤 추구를 위해 조직된 법인격체다. 직원에게 맞춰진 곳이 아니라 직원에게 맞출 것을 요구하는 공간이다. 이건 잡플래닛 1점대 중소기업부터, 세계 최고의 IT기업까지 마찬가지다. 직원은 그 시스템 하에서 일하는 대가로 일말의 안정감과 소속감을 얻어낸다. 대신 자신이 받은 것보다 훨씬 많은 가치를 창출해야만 살아남는다. 아니, 그렇게 해도 언젠가는 나오게 된다.
몇 가지 크고 작은 사건이 겹쳤고, 결국엔 조심스레 퇴사를 말씀드렸다. 당시 난 팀장 포지션이었기에 이런저런 조율을 해야 했다. 안정화가 될 때까지 얼마간 더 일하는 걸로 합의했다. 그렇게 몇 달을 더 붙어있다가 완전히 나오게 되었다. 내 인생 두 번째 퇴사였다.
이번에야말로 갈 곳이 정해지지 않았다. 얼마간은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푹 쉬고 신나게 놀았다. 사귀던 여자친구와 결혼했고 지자체에서 주관하는 청년 대상 프로그램도 열심히 다녔다. 글을 쓰고 책과 영화를 봤다. 자연에서 걷고 요리를 하고 달렸다. 그렇게 영혼은 채워졌지만 다른 한쪽에서 무언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건 통장 잔고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무언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불안감이기도 했다.
프리랜서로 일하던 아내는 내가 회사를 다녔으면 했다. 한 명은 안정적으로 월급도 받고, 4대 보험도 들고 있어야 되지 않겠냐며. 식은 올렸지만 의료보험 문제 때문에 혼인신고도 하지 못한 참이었다. 실업급여 수급 기간이 끝나갈 무렵 다시 구직을 시작했다. 취준생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렇게 자소서를 쓰고 이력서를 정리하며 내 지난 커리어를 톺아보았다. 뭘 많이 한 줄 알았더니 이렇게 한 줄로 쉽게 정리가 되다니, 그래도 나 이것저것 하긴 했구나, 하면서.
결국 한 회사에 합격해서 입사를 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마케팅 직무였지만 얼마간의 경력을 인정받아서 주임 직급도 달게 되었다. 말이 주임이지 사실상 신입이다. 그렇게 세 번째 신입 라이프가 시작되었다.
여기까지 왔다면 (부모님을 비롯한) 많은 이들은 내가 세 번째 회사에 정착하는 결말을 그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난 취업 공고를 뒤적일 때부터 퇴사를 생각하고 있다. 여기서 회사 생활을 청산할 수도, 이직을 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내가 회사에게 영원하지 않듯 회사도 나에게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조직에서 부대끼지 않고 내 일을 하겠다는 라이프스타일 목표를 이룰 때까지 탐색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일은 그 자체로 힘들다. 힘들지 않고 재밌고 보람차기만 한 일은 없다. 그런 일이 있다면 아마 경제적 대가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일이라는 게 그렇다. 다만 그 일의 과정과 끝에서 느낄 일말의 보람과 충만함을 위해, 또한 생활인으로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인내할 뿐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괴로움으로만 점철되지 않고 견디어 나갈 수 있는 일의 형태를 조탁하는 것, 그리고 그 일의 목적을 세우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먹고사니즘도 사실 훌륭한 목적이다. 스스로의 인생을 책임진다는 건 비록 무겁지만 감수할만한 몫이다. 누군가에게 경제적 책임을 의탁한다는 건 그 액수 이상의 권리를 양도한다는 말과도 같으니까. 다만 세상 그 누구도 빵만으로는 먹고살 수 없다. 아무리 돈돈돈 하는 사람도 아무런 보람 없이 일을 지속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억지로 하는 일에서 높은 경제적 대가와 지속성을 바라긴 힘드니까.
그러니 다음 퇴사 전까지만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