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가 보여주는 봄(春)
봄이면 꼭 벚꽃축제 소식이 들려온다. 나는 그런 데 갈 바에 차라리 뒷산으로 산책하러 가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지만 꽃잎이 휘날리면 한 번씩 마음이 흔들린다. 꽃보다 사람이 더 많고 집 근처 공원을 두고 멀리 나갈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꽃놀이하러 갈까? 하고 말이다. 이런 것을 보면 봄꽃은 이렇게 이성을 살짝 흔들어버릴 정도로 사람을 설레고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것 같다. 봄이 되어 한가롭게 꽃이 핀 거리를 거닌다니 얼마나 마음이 편안해지는가. 봄, 하면 이렇게 봄꽃을 빠트릴 수 없다.
하지만 절기에서는 이런 생각과는 다르게 봄꽃에 대한 찬사나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는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고대 사람들은 봄에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도대체 봄에 따뜻한 기온을 반기듯 피어나는 꽃들이 아닌, 무엇을 보았던 걸까?
입춘은 봄기운의 시작을 알리는 동시에 절기가 시작하는 날이다. 1월 1일에 시작하는 달력과 다르게 절기에서는 봄을 일 년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봄절기를 살펴보면 시기마다 변화하는 봄의 풍경을 떠올릴 수 있다. 절기는 약 2주 간격으로 돌아오는데 입춘立春 다음인 우수雨水는 눈이 녹아 비가 내리는 시기다. 그 다음 절기인 경칩驚蟄은 숨어있는 것들이 놀란다는 의미로 이 시기에는 비가 땅을 두드려 아래에서 잠들어 있던 동물들이 깨어난다. 춘분春分은 길었던 밤시간이 서서히 줄어들어 낮과 밤이 같은 시간이 되어 봄의 경과를 보여주는 절기이고, 청명淸明에는 이름 그대로 밝고 맑은 하늘 아래에서 활동하기 좋아진다. 그리고 곡우穀雨가 되면 동물을 깨우던 비처럼 곡식을 깨우는 비가 내려 비로소 농작물이 자라날 수 있게 된다.
봄절기에 따르면 봄에 가장 먼저 일어나는 변화가 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입춘立春 다음인 우수雨水는 글자 그대로 빗물을 의미한다. 이는 봄기운이 일어서고 나면, 눈이 녹아내리는 것이 가장 먼저 일어나는 반응이라는 걸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마지막 봄절기도 비가 등장한다. 바로 곡식을 깨운다는 곡우穀雨다. 봄절기는 결국 비로 시작해 비로 끝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봄 하면 떠오르는 봄꽃은 어디가고 왜 이렇게 비를 강조했던 것일까?
그 이유는 고대 사람들이 비가 내리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사실 봄은 1년 중 가장 먹을 것이 부족한 시기다. 오늘날에는 먹을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 화려한 꽃과 포근한 날씨만 즐길 수 있지만 먹을 것이 귀했던 옛날에는 수확한 농작물을 겨우내 모두 소진하고, 봄이 되면 문자 그대로 춘궁기(春窮期)가 되어 경칩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도롱뇽이나 개구리 따위를 잡아먹었다고 한다. 봄에는 꽃이 피지만 열매가 맺히지는 않고, 산과 들에 새싹이 돋지만, 풀잎에 가까운 나물뿐이다. 그러니 먹을 것을 찾아 힘겹게 산과 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어서 빨리 줄기가 자라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농작물을 기르고 싶어졌을 것이다. 비가 땅을 두드려 동물들을 깨웠던 것처럼, 비중에서도 곡식을 깨워줄 곡우穀雨가 오기를 기다리며 봄을 보내지 않았을까. 고대 사람들에게 비는 봄이었다.
봄을 떠올리면 꽃놀이 정도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내가 절기를 통해 봄비의 중요성을 발견한 것은 좋은데, 어딘가 아쉽다. 아무리 그래도 봄이면 와르르 쏟아지듯 피어나는 꽃들과 기지개 켜듯 뻗어가는 새싹들은 빠질 수 없는 것 아닌가? 생명이 깨어나고 태어나는 그 모습은 한자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일까? 아쉬워하던 중, 봄春 그 자체에서 그 생명력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春은 아래의 日(해)과 그 윗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갑골문부터 현대까지 변화된 자형을 살펴보면 윗부분이 풀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풀을 가리키는 艸자와 屯자가 한 곳으로 모여 오늘날의 봄 춘春자의 자형을 가지게 된 것이다. 춘春자의 자형 변화를 살펴보면 해日가 점점 아래로 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해의 위치를 통해서 고대사람들이 봄에 해가 가지는 상징과 의미를 짐작해볼 수 있다. 해는 보통 하늘에, 적어도 풀보다 위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春에서는 풀무더기 아래에 해가 위치해있다. 풀이 자라는 곳은 땅이니 풀보다 아래에 해가 있다는 것은 해가 땅에 있다는 말이다. 왜일까? 봄이라고 해서 해가 낮게 뜨거나 하지 않는데 말이다.
태양은 예로부터 음양 중에서 양의 기운을 상징한다. 양의 기운은 높고, 강직하고, 활발함을 의미한다. 이런 양의 기운은 위로 자라나며 뻗어가는 풀의 모습과 잘 어울린다. 그렇다면 春에서 태양이 풀보다 아래에 있는 것은 땅이 태양의 기운을 품고 새싹을 틔우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풀이 자라나기 시작하는 것이 봄의 일, 그 자체라는 거다.
春에는 직접적으로 생명과 관련된 부분도 있다. 갑골문 속 새 발자국 같은 한자는 조그맣게 자라난 새싹을 표현한 것으로 바로 날 생(生)의 갑골문이다. 生은 오늘날 생명뿐만 아니라 생명이 태어나는 일, 삶을 살아가는 일, 강한 생명력 그 자체를 의미하는 한자다. 생명의 전반적인 의미를 지니는 한자가 자그마한 새싹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고대사람들이 사방에 풀들이 자라나는 봄에 강한 생명력을 느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春에는 日과 生뿐만 아니라 하나의 한자가 더 포함되어 있다. 바로 屯이다. 둔, 그리고 준이라고 읽히기도 하는 이 한자는 生과 마찬가지로 풀을 표현한 한자다. 하지만 두 한자가 같은 의미를 가지지는 않은다. 한자는 그 숫자가 워낙 많아서 마구잡이로 만들어낸다는 오해를 살 수 있지만, 사실 새로운 한자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주 신중한 일이었다. 똑같이 풀로부터 만들어진 한자여도 고대 사람들은 屯에 단순한 풀(艸)이나 생명력(生)이 아닌 다른 의미를 담고 싶었을 것이다.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주역에는 屯의 이름을 가진 수뢰둔괘(水雷屯卦, ䷂)가 있다. 이 괘를 풀이하기 전에 이 괘의 위치가 보여주는 상징과 의미를 알아보자.
수뢰둔괘는 64개의 괘 순서 중에서 세 번째에 해당한다. 둔괘가 세 번째인 것은 앞선 첫 번째와 두 번째 괘 때문에 중요해진다. 마치 春에서 해의 위치가 가진 의미처럼 말이다. 주역의 첫 번째, 두 번째 괘는 건(健, ䷀)괘와 곤(坤, ䷁)괘다. 이 두 괘는 각각 하늘과 땅을 의미하는 괘로, 세상에 만물이 하늘 아래와 땅 위에 존재하는 것처럼 세계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주역에서는 이 순수한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을 가장 앞에 배치함으로써 세상의 다양한 변화를 담은 여러 가지 괘가 이어질 수 있도록 했다. 그렇다면 바로 이어지는 둔괘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둔괘는 물(☵, 감괘) 과 우뢰(☳, 진괘)가 위아래로 조합되어 물을 잔뜩 머금은 먹구름에 천둥이 치며 금방이라도 비를 내릴 것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비! 봄이 되면 만물을 깨우고 자라나게 하는 비다. 이렇게 하늘과 땅의 기운에 이어서 비구름이 몰려오는 모습은 <여씨춘추呂氏春秋>가 묘사하는 봄과도 연결된다.
이달에는 하늘의 기운이 아래로 내려오고 땅의 기운이 위로 솟구쳐 올라가므로 천지가 전체적으로 잘 어울리고 초목이 바쁘게 움직여 소생한다. 是月也,天氣下降,地氣上騰,天地和同,草木繁動.
(여씨춘추, 맹춘기)
<여씨춘추>에서 설명하는 봄을 살펴보면 봄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을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다. 뒤섞인 기운에 생물들이 반응해 소생(蘇生)한다는 것이다. 소생한다는 것은 다 죽어가던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 일, 잠들어 있던 것이 깨어나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 건괘와 곤괘로 인해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이 서로의 방향으로 뒤섞이기 시작하니 둔괘가 머금고 있는 비가 내리면 이제 땅 위의 생물들이 깨어나 자라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둔괘는 아직 비가 내리지 않는 형상이다. 비가 내려야 하는 건 분명한데 내리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먹구름 아래로 천둥만 치고 있을 뿐 비가 내리진 않는다. 그래서인지 둔괘의 풀이를 보면 봄에 느껴지는 생명력에 대해서 논하고 있지 않다.
어째서 둔괘는 봄이 보여주는 생명력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지 않는 걸까? 여기서 屯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드러난다. 屯의 자형을 보면 가장 긴 획이 길고 크게 꺾여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획은 땅을 뚫고 자라나는 줄기를 표현한 것으로 학자들은 이것이 생명이 태어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이 표현된 것이라 해석하곤 한다. 크게 휘어진 획은 겨우내 굳어있던 땅거죽을 뚫어내느라 줄기와 뿌리가 굽어진 모습이라는을 거다. 땅을 뚫고 자라나는 새싹은 강한 추진력과 뻗어 나가려는 강인함을 가지고 있지만, 屯은 무언가를 뚫고 나아가는 간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자다. 그래서인지 둔괘는 새싹을 의미하는 한자(屯)의 이름을 가졌지만 비가 내리지않는 봄의 초창기에 혼돈과 어려움을 어떻게 처신하면 좋을지 알려줌으로써 비로소 자라난다는 것, 태어나는 것, 생명의 어려움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나는 봄이 오면 기쁘고 설레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울과 무기력에 빠지기도 한다. 그럴 때면 따스한 햇볕이 내리고 거리에 꽃향기가 퍼져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진다. 오히려 산과 들에서 느껴지는 생명력이 나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것 같아서 원망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기까지 한다. 봄의 생명력이 모두에게 다르게 작동하는 것일까? 실제로 이런 괴리감 때문에 봄이 시작되는 시기에 가장 생을 저버리는 일이 많다고 한다. 특정한 대상도 없이 나 혼자 동떨어져 있는 듯한 이 이상한 감정이 참 곤란했다.
그런데 수뢰둔괘를 살펴보고 봄날에 소생하는 생물들에게도 내가 느끼는 불안과 곤란함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생명이 자라고 성장한다는 건 곧 혼란과 고난을 의미한다는 것을 수뢰둔괘가 말해주고 있었다. 마치 봄꽃에 가려져 봄비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처럼, 불안과 곤란함 속에 이미 새로운 희망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그동안 나는 보지 못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