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희 Mar 20. 2022

빛의 여진(餘塵*)

노가리클럽 3월호

“뉴스를 보면 세상이 이렇게 나빠져도 되는 걸까 싶다. 거대한 구멍 하나가 내 발 밑에 있다.”* 

근 몇년간, 이런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많을 거라 예상합니다. 정의구현을 바라지만 나조차도 실천하기 어려운 세상이에요. 한때는 분노가 마치 연료인 것처럼, 땔감 삼아 활활 태우며 그 힘으로 움직이던 때도 있었어요. 얼마 안 가, 태운 건 땔감이 아니라 내 몸뚱이었다는 걸 깨달았죠. 하얗게 타버린 나와 다르게, 세상은 한치의 미동도 없이 그대로라는 걸 깨달았을 땐 깊은 무력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때 한줄기 빛처럼 한여진이라는 인물이 제 삶에 들어왔어요. 한여진(배두나 분)은 드라마 '비밀의 숲(tvn)'의 주인공으로, 불의를 보면 지나치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정이 아주 많은 강력계 형사입니다.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다 그녀의 명대사 한마디만 들으면 바로 성격을 알 수 있죠.


“저 사람들이 죄다 처음부터 잔인하고 악마여서 저러겠어요? 하다 보니까… 되니까 그러는 거예요. 눈 감아주고 침묵하니까. 누구 하나만 제대로 부릅뜨고 짖어주면, 바꿀 수 있어요.



‘세상과 절대 타협하지 않겠다’며, 개썅마이웨이를 척척 걷는 이 멋진 여성은 등장과 동시에 롤모델이 되었습니다. 드라마가 시즌 2를 맞이하면서, 한여진이 한줄기 빛처럼 여기는 롤모델이 등장하는데요, 바로 이름마저 찬란한 최빛(전혜진 분)이죠. 최빛은 경찰청 정보부 부장으로, 강한 야먕을 드러내는 능력캐입니다.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한여진의 마음은 왜 무너졌으며 최빛은 그를 어떻게 끌어올렸는지…를 다 설명하려면 여러분의 메일함이 터질 수도 있으니 과감하게 생략하겠습니다. 드라마로 확인하세요. 다만 이 둘의 마지막에 대한 이야긴 꼭 해야겠어요. 최빛은 자리에서 물러나는 마지막까지 여성 후배를 위해 강한 연대를 보여줬습니다. 옳은 일을 했을 뿐인데 직장에서 손가락질 받을 게 뻔한 후배를 위해, 힘을 뻗을 수 있는 데까지 뻗어 여성 후배가 마음을 다잡을 수 있도록 도운 것이죠.


어쩌면 제가 무력감의 구렁텅이에서 금세 빠져나와 다시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주위의 언니들 덕분인 것 같습니다. 여진이 빛을 따라 걸은 것처럼, 깜깜한 어둠 속을 걷는 기분이 들 때마다 넘어지지 않도록 발 밑을 비춰주며 손을 잡아준 언니들이 있었기에 나아갈 수 있었죠.* 우리 주변에, 직장에, 세상에 더 많은 최빛과 한여진이 생겨나길 바랍니다. 그래야 쫄래쫄래 언니들의 뒤를 따라 걷는 어린 여성들도 많이 생겨날 테니까요. �


*餘塵 남을 여, 티끌 진: 옛사람이 남긴 자취라는 뜻으로, 고전시가에서는 활용에 따라 ‘타인의 뒤를 잇다’는 뜻이로 쓰이기도 함

* 책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무루 저)』 중 인용

* 책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 (황선우 저) 중 차용



*본 글은 뉴스레터 '노가리클럽'에 발행되었습니다.



뉴스레터 노가리클럽 구독하기 (클릭)

노가리클럽은 매달 15일 발송됩니다. 덕질할 때만 생태 눈깔이 되는 여성 셋이 모여 각자 좋아하는 작품을 추천합니다. 영화, 음악, 뮤지컬, 책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영업합니다. 저희와 함께 노가리 까지 않으시렵니까?


| 인스타그램 @nogariclub

매거진의 이전글 마음이 종종걸음 치는 날엔, '걷기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