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가리클럽 10월호
길진 않지만 회사 생활을 몇 년 해보니, 사람마다 ‘나 지금 힘들구나’를 깨닫는 척도가 다 다르더군요. 누군가는 몸에서 신호가 와서 병원 가는 길에 깨닫고, 누군가는 도저히 타인을 만날 체력이 없어 주말 약속을 취소하며 깨달아요. 저의 척도는 식물이에요. 내 몸이 시들어가는 건 스스로 깨닫지 못할 때가 많은데, 집에 있는 식물이 시든 걸 보면 불현듯 깨닫죠. “내가 물도 못 챙겨줄 만큼 바빴구나.”하고 말이죠. 부랴부랴 온 집안에 있는 화분을 꺼내 와 급하게 물을 주고, 흙이 벌컥벌컥 물을 흡수하는 소리를 들으며 ‘제발 죽지 말아 주라, 제발…’하며 애원하는 게 요즘 루틴입니다.
대부분의 식물들이 잘 버텨주고 있는 반면, 작은 히메몬스테라는 여전히 맥을 못 추고 고개를 이리저리로 푹푹 꺾고 있었어요. 현생이 바빠지니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방치하게 되더라고요. 지난 주말, 서울 자취방에 엄마가 놀러 와 화분을 보더니 슥 데려가 물을 솨아 내려주었어요. 그동안 히메몬스테라를 살려보려고 노력할 땐 별 반응 없더니, 엄마가 물 한번 흠뻑 주니 거짓말처럼 쌩쌩하게 살아나더라고요. 무슨 마법을 부린 건지 신기해서 화분에 뭘 해준 거냐고 물어보니 엄마의 대답은 매우 간단했어요. “물을 줄 거면 오래오래 흠뻑 줘야지. 잠깐씩 주는 걸로는 안 돼.”
너무나도 간단한 방법이라 허무했지만, 무언가 해결된 듯 속이 시원했어요. 그동안 식물은 스스로 지쳤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척도이기도 했지만, 식물에 물을 주고 잎사귀를 매만져 먼지를 닦아주고, 분무기로 시원하게 물을 뿌려주는 과정을 거치며 지친 마음을 힐링하는 해결책이기도 했거든요. 틈틈이 쉬어도 시들한 마음은 왜 되살아나지 않을까 궁금했는데, 내 기분을 좋게 만드는 데 시간을 흠뻑 투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급하게 잠깐씩 돌봐서는 살아나지 못하던 히메몬스테라처럼, 내 기분도 급하게 잠깐씩만 들여다봐서는 좋아질 수 없었던 거였죠.
“(…중략) 이게 바로 그 ‘풀멍’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식물과 햇빛을 그저 바라보는 일로
나는 치유받고 있었다.
너무 많은 일들이 몰아치면
누구나 번아웃이 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번아웃을 치료하는 데에는
식물과 햇빛만큼 좋은 것이 없다.
물론 그 일에는 ‘시간’이라는 비용이 필요하다.”
-책 본문 중 일부 발췌
친구에게 이 책을 선물 받은 후 너무 좋아서 엄마에게도 빌려줬었는데, 마침 엄마가 이 책을 돌려주며 히메몬스테라도 되살리고 제 기분도 되살려준 것 같았죠. 책은 회사에서 13년간 일하다 번아웃이 와 퇴사를 한 후 식물을 키우기 시작해 식집사로 이름을 날리게 된(?) 신시아 작가의 에세이입니다. 이미 식물 좀 좋아한다 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읽으며 당장 화원으로 달려가고 싶으니 주의해야 해요. 아직 식물에 대해 잘 모르겠는 분들은 크게 매력을 못 느낄 수도 있어요. 희귀 식물을 보고 환호하는 내용, 베란다에 튤립 화분 50개를 두게 된 사연, 질 좋은 토분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내용 등이 담겨있거든요.
그럼에도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는, 분명 식물을 통해 기분이 나아지는 누군가가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스스로 얼마나 힘든 상태인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물과 햇빛을 줄 타이밍을 놓쳐 시들어가고 있을 누군가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내 기분이 초록이 될 때까지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요. 내 기분을 가장 오래, 가장 면밀히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은 스스로 밖에 없어요. 아직 식물에 대해 큰 관심이 없더라도, 이 책을 시작으로 스스로의 기분을 돌보는 데 시간을 들였으면 해요. �
*본 글은 뉴스레터 '노가리클럽'에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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