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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동하는독서 May 09. 2024

남들에게 특별한 칼국수

"정말 맛있는 칼국숫집을 찾았어요."

점심시간에 지인이 나를 이끌었다. 걸어가도 멀지 않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맛집이 있었다는 소식은 처음 들었다. 근처에서 그토록 맛집을 헤매었는데 언제 그런 것이 생겼단 말인가?

"어떻게 아셨는데요?"

"우리 남편이 맛집 마니아잖아요. 얼마 전에 남편이 소개해 줬어요. 정말 찐 맛집입니다."

그분 남편은 맛있는 집이 있다면 몇 시간 거리도 찾아 나설 정도이니 믿을만했다. 골목을 돌아가자 새로 오픈한 곳은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는 간판이 보였다. 우리 아이들 유치원에서도 가까워서 자주 봤던 곳인데 확 끌리지 않았던 그 집이다. 안동 국시! 안동 국시가 유명했나?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국수를 일부러 국시라고 한 걸 보면 뭔가 관심을 끌어보려고 한 듯하다.

신발을 벗고 상에 둘러앉았다. 반찬이 먼저 나오고 메인 국수는 기다려야 했다. 김치, 나물, 멸치볶음, 호박전이 나온 걸 보니 나름 기대감이 올라갔다. 우리를 안내해 준 지인이 자랑하듯 설명했다.

"여기 이게 이 집의 핵심이에요. 이 양념장!"

조선간장에 달래, 고추, 양파가 잘게 썰려 나름 맛깔스러운 향이 났다. 그리고 국수가 나왔다. 양념장이 왜 필요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칼국수에는 아무런 간도 되어 있지 않았다. 심지어 그 흔한 조개 하나 보이지 않았다. 파란 호박만 채 썰어 들어가 있으니 양념장으로 모든 맛을 내야 했다. 주인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지인에게 속삭였다.

"이게 맛집이라고요? 이거 우리 어머니가 자주 해주시는 칼국수인데?"

"그래요? 저는 이런 칼국수 첨 먹어봐요."

"고향이 대구신데 처음이라고요? 고향이 경상도이신 우리 어머니가 오래전부터 이렇게 해주신 칼국수가 이건 데요."

일단, 양념장을 넣고 간을 맞추고 칼국수를 입에 넣었다. 그래 그때 추억의 맛이다. 이런 맛을 새로운 맛으로 발견하는 사람들도 있구나. 내게는 특별한 맛집이라기보다 그때 그 맛 이상은 아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지인이 맛집이라며 그 집으로 나를 또다시 인도했다. 이제는 나도 맛집이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칼국수가 이런 모습이라 생각했다. 칼국수를 하는 날이면 가족들이 방에 둘러앉았다. 큰 도마를 방 가운데 꺼내놓고 반죽해 둔 밀가루를 홍두깨로 펼치기 시작했다. 덩어리 반죽은 조금씩 밀려나가며 작은 담요처럼 넓어졌다. 어머니는 밀가루를 뿌리고 다시 말고 다시 펼치기를 반복했다. 어머니는 이불 포개듯 말아진 반죽을 칼로 썰어나갔다. 국수를 손으로 들어 다시 펼쳐주고 밀가루를 뿌려 서로 붙지 않게 했다. 마지막 꼬투리는 꼭 남겨주셨다. 그걸 연탄 뚜껑에 얹어 노릇하게 구워주면 먹을 것 흔치 않던 그 시절의 간식이 되었다.


작은 단칸방에 모여 함께 만들고 넓은 밥상을 펼쳐 같이 나누어 먹는 칼국수는 그저 밥 대신 먹는 한 끼 식사였다. 조금 기교를 부린다면 김치를 넣으면 그만이었다. 차라리 간장 양념의 칼국수보다는 칼칼한 칼국수가 나았다. 국수 대신에 반죽을 손으로 뜯어 넣으면 수제비가 되었다. 수제비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경상도라서 그런 칼국수를 먹는 거라 생각했다. 그냥 경상도의 맛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걸 특별한 맛이라고 찾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외식이라고 해봐야 동네 짜장면 집이 전부였던 시절이라 집에서 많은 걸 해 먹던 때였다. 만두는 손이 더 많이 가는 음식이라 자주 하지는 못했다. 만두나 송편을 잘 빚으면 예쁜 여자랑 결혼한다고 해서 얼마나 애썼는가? 그때는 작은방에서 가족들이 모여 많은 걸 해 먹었다. 서울 살이의 고단함을 잊을 수 있는 행사였고, 외식의 비용을 아낄 수 있는 수단이었다. 어디에 가도 이런 맛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칼국수가 부모님에게는 떠나온 고향의 맛이었을 테지만 내게는 그저 간장맛으로 먹는 국수 모양뿐이었다. 동네 구멍가게에서 파는 간장이 더 맛있는데 왜 냄새도 이상한 조선간장일까? 따뜻한 밥에 마가린과 먹는 간장맛은 일품인데, 굳이 칼국수에는 전통간장을 쓰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맛집이라고 가는 곳은 대부분 조선간장으로 맛을 내는 곳이다. 내 입맛은 결국 부모님의 맛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가끔은 동네 아저씨들을 불러 모아 같이 드시는 적도 많았다. 고향은 달라도 서울에 모여 산다는 이유로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되었다. 먹고살기 위해 서울로 모여들던 시절이다. 서울 인구가 넘쳐난다고 하는데도 지금도 서울로 올라온다. 서울에서 서울 토박이를 만나기는 어렵다. 그만큼 고향의 먹거리는 많은 발전을 거듭하고 있을 테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바지락 넣은 칼국수를 알았다. 해물도 넣고, 심지어 매생이까지 넣었다. 다양한 칼국수를 접하며 어머니가 만들어주었던 칼국수를 잊었다. 그런데 도시의 어느 한켠에서 추억의 맛을 다시 맛보게 된 것이다. 아직도 서울에 살고 계시는 어머니 집에 가면 이제는 더 이상 국수를 직접 만들지 않으신다. 슈퍼에서 구매한 국수로 잔치국수를 끓이신다. 우동면을 이용하여 끓이기도 하지만 그때 그 맛은 아니다. 유명 식당들도 다르지 않다. 대부분 기계로 뽑아 균일한 면발을 자랑한다.

친한 분이 분식집을 오픈했길래 들렸다. 메뉴에 꼬투리 김밥이란 게 있어 시켜보았다. 보기도 좋은 가운데 김밥은 어디 가고 꼬투리만 잘라 나오는 아이디어는 어디서 가져온 것일까? 작은 김을 이용하여 꼬투리만 남겼을 테다. 칼국수에서도 이 꼬투리가 내게는 중요했다. 그건 누구의 것도 아니라 바로 내 것이 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오랜 시간 단칸방에 피워두었던 독일제 석유난로와 딱 맞았다. 자칫 주인공에서 밀려나는 것이 마치 우리네 인생과도 닮아 있다. 그 꼬투리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많다. 서로 먹으려고 달려드는 경우도 있으니, 이제는 특별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와서 그 칼국수가 심하게 그리운 것은 단지 맛 때문이 아니다. 가족들이 함께 작은방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며 만들어 먹던 그 모습이다. 이제는 모두 가정을 일구어 따로 살고 있다. 서울에 경기도에 떨어져 살다 보니 한 달에 한 번 모이기도 쉽지 않다. 숫자로 세어보면 얼마나 우리가 자주 모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삶이 바쁘다는 핑계가 가로막는다. 어릴 적 같이 나누던 별거 없던 따뜻한 칼국수가 그리운 것은 함께 하는 시간이 부족해서 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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