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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리아 Oct 25. 2022

오늘의 날씨 : 흐림

크롤리에서 찾은 생의 조각



그런 때가 있다. 왠지 컨디션도 저조하고 기분도 쳐지는 날. 문득 가만히 고여있고만 싶은 하루. 영국 크롤리에서의 아침이 딱 그랬다. 런던 중심부와는 동떨어진, 도시라 부르기엔 작음직한 동네 크롤리. 하늘은 영 흐리고 잿빛 구름은 빠르게 지나며 해를 보였다 감췄다 한다. 회사에서 제공해준 호텔도 여지껏 머물렀던 방들 중에 가장 작았다. 아니, 비교적 심히 작았다. 그래서인지 내 맘의 공간도 썩 줄어든 느낌이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비행기_Crawley, England

그래도 방 안에 심심히 머물기엔 아직 내 비행경력이 젊다. 기분이야 어떻든 가방을 챙겨 나서본다. 불행 중 다행인지 이 곳의 건물과 집들은 모두 이층주택 정도로 낮았고, 덕분에 드넓은 하늘을 품기 좋았다. 왠지 다시금 가슴이 트이기까지 한다. 그렇게 계획없이 한참을 걷고 또 걸었다. 내가 걷는건지 다리가 자동으로 뻗어지는 건지 구분도 어려울 지경. 우연히 만난 너른 풀밭 공원에 잠시 무릎을 쉬게둔다.

드넓은 풀밭을 가진 공원_Crawley, England

벤치에 앉은 채 멍하니 사람구경을 한다. 저 멀리 리트리버 한마리와 프렌치 불독, 포메라니언까지 데리고 온 대가족이 있다. 대여섯살 정도로 보이는 남매는 깔깔거리며 전속력으로 뛰어다니고 아빠와 엄마는 강아지들에게 공을 던져준다. 행복이란 단어가 생명을 입으면 저럴까. 너무 사랑스러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무거웠던 마음에 먹구름이 살짝 걷힌다.

크롤리의 닮은 도로와 건물들

크롤리는 언뜻 보기에 정말 작은 마을처럼 보인다. 사실 그렇게 작진 않지만, 길가와 건물들이 다 낮고 비슷하게 생겨서 그럴거다. 서너블럭가다보면 정원이나 공원을 마주하는 경우도 다반사니, 마치 거대한 미로 속을 헤매는듯 하다. 생각 속에서 길을 잃는 것보다 이렇게 열심히 방향을 찾으며, 호흡을 가다듬다 하늘과 눈 마주치기도 하는 순간이 더 낫다. 밖으로 나오길 아무래도 잘했다.

크롤리 스타벅스에서

조금 더 돌아보다 왔던 길로 몸을 돌린다. 아까 봐뒀던 스타벅스에 들어가 오늘을 또 기록해야지. 낯선 곳에서도 계속 익숙함을 찾는걸 보니 어디 기댈 곳이 필요했나보다. 익숙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켜서, 익숙한 소파자리에 앉아, 익숙한 키보드를 펼친다. 내 주변 한평 남짓한 공기가 아는 것들로 가득하다. 들이 마시고 내쉬는게 조금은 더 자연스러워졌다. 그래, 오늘은 이런 날이구나. 이런 하루가 또 지나가구나.

한바탕 비가 휩쓸고 간 도로와 금방 개인 하늘_Crawley, England

런던과 가까운 이 곳은 날씨를 예측할 수 없다. 뭉게구름 파랗게 맑았다가도 금새 하늘이 버럭 성을 낸다. 비가 오기 직전, 한 남자가 "The Viking is coming! (바이킹이 오고있어!)" 하고 소리치며 후드티 모자를 바짝 조였다. 그러곤 신기하게도 3분내로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업앤 다운이 장난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여기 사람들은 비오는 걸 당연시 여긴다.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조용히 모자를 쓰거나(대부분 모자가 달린 옷을 입고 있다.) 지붕 밑에 들어가 잠시 비를 피한다.

크롤리의 비 그친 후 석양과 다음 날 맑게 편 하늘

그래, 이런거지. 맑은 것도 흐린 것도, 내리는 비 혹은 눈송이도 다 자연스럽다. 어느 것 하나 거를 수 없다. 그렇다면 또 환영의 인사와 함께 껴안을 수밖에. 삶의 다양한 기복도, 때로는 가슴에 물이 잔뜩 고여버리는 날도 잠시 멈춰서 지나가게 내버려 두거나, 미리 준비해둔 모자를 꺼내면 된다. 스스로 길을 찾고 나니 어깨가 시원하게 펴진다. 한결 걷힌 가슴으로 마지막 커피 한모금을 들이킨다. 쌉싸름한 향이 유난히 오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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