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땐 무겁고 올 땐 가벼운 카트만두
요즘 이 곳 저 곳을 다니다보면 힘들지 않은 곳이 없다. 정말이다. 아무리 잘 사는 나라일지언정 살기가 너무 팍팍해졌단 얘기가 들린다. 도망 치고는 싶은데 이미 궁지에 몰려버려 갈 곳도 없다. 그냥 여기서 버티는 수밖에. 매일같이 늘어나는 한숨에 가슴은 답답하지만 일단은 또 살아내본다. 휘청거려도 아주 넘어지진 않도록. 아직은 내가 잡아주어야 할 손들이 남아있기에.
썩 좋지 않은 컨디션으로 도착한 네팔의 카트만두는 이미 자정을 넘은 시간이다. 하늘이 분명 맑은데 어딘지 모르게 뿌연 감이 있다. 별이 반짝이는게 보이지만 선명하진 않다. 묘한 기분으로 숨을 들이마시자 콧 속으로 진한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훅 들어온다. 왠지 이 질척이는듯한 끈적임에 거부감이 차오른다. 조금은 기대했던 여행지였는데 내일 그냥 밖에 나가지 말까 잠시 고민하게 된다. 한낮에는 좀 쾌적하겠지. 몸을 기울여 느린 속도로 짐을 풀고 쥐도새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꽤나 푹 잤다 싶어 눈을 떠보니 이미 해는 가까이에서 온세상을 비추고 있다. 문 밖으로 나서며 기지개를 쭈욱 켜는데 아직 어젯밤의 그 공기다. 어라, 뭐지? 사방을 살펴보니 여전히 뿌옇다. 내 눈이 잘못된건가. 자세히 살펴보니 좁은 간격으로 향이 피워져있다. 내가 들이마셨던 공기는 다름아닌 향을 피워나온 연기였던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지이자 3억이 넘는 신들을 섬기는 나라답게 곳곳에 작은 상징들과 벽화들이 채워져있다. 멀리서 보이는 에베레스트산과 당장 눈을 들면 하늘을 빽빽하게 덮은 전선줄. 게다가 연기로 뽀얗게 덮힌 마을 곳곳. 카트만두는 이렇게 자신만의 성질을 오롯이 가지고 있다.
한참을 걸었을까. 정말 미안한 마음이지만 단 하나의 생각을 도무지 뿌리칠 수가 없었다. '여기, 정말 가난하구나.' 카트만두는 네팔의 수도이자 최대도시다. 그런데 도대체가 빌딩의 개념조차 없고, 차선하나 없는 길엔 온통 고물 자동차에 사람들은 길거리에 바글바글 앉아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다. 사실 길이랄 것도 없다. 그냥 흙밭이다. 나중에서야 네팔이 세계 10대 빈국중에 하나라는걸 알게되었다. 그런데도 전혀 모르고 왔으니 충격받을 수 밖에.
한국으로 꽤나 긴 겨울 휴가를 들어가기 직전이기에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줄 기념품을 살 계획이다. 발 닿는대로 여러 상점을 둘러보는데 싱잉볼(문질렀을 때 신비한 소리를 내는 그릇, 주로 명상에 쓰인다)을 잔뜩 쌓아둔 곳에 눈이 간다. 눈길을 끌었으면 또 들어가줘야지. 지하로 살짝 경사진 입구를 따라 내려가니 건장해보이는 한 할아버지가 머리를 질끈 묶고 투박하지만 깔끔한 전통 복장에 양손과 목에 염주를 주렁주렁 메고 있다. 손님이 오는둥 마는둥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자리에 가만히 앉아 무언가에 몰두한 모습이다. 오히려 편하게 구경할 수 있어 좋아.
한참을 구경하다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래도 주인이니 나도 은근히 눈치가 보였나보다. 그러자 기다렸다는듯 화통한 목소리로 "You, why are you worried that much?"(당신, 왜 그렇게까지 걱정하나요?) 라고 말을 던지신다. 처음 건네는 인사라기엔 영 이상하다. 멋쩍게 웃으며 넘어가려하니 또다시 한방. "You already have all you need. You're beatiful, healthy, and also have the people that you love around you. What do you need more to be happy?"(당신은 이미 필요한 모든 걸 가졌어요. 아름다움, 건강함, 그리고 당신 곁의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행복하기 위해 무엇이 더 필요한가요?)
마치 나를 꿰뚫는 듯한 그 노인의 말에 흥미가 생겨 몇번의 대화를 주고 받았다. 이미 모든걸 알고있는듯 여유로운 눈빛에 자신감 가득찬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더 신뢰가 갔다. 한참을 얘기를 나누다 가게를 나왔는데, 왠걸. 그때부터 카트만두의 풍경이 달라보였다. 내가 행복이라 여겼던 건 무엇인가. 꼭 이래야만 한다는 그 기준은 언제 세워진 것이길래 여기 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겼던가. 다들 총명한 눈으로 주어진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이렇듯 나와 같은 사람인데 나는 어디서 이들을 내려다 보았고 무엇을 도구삼아 판단했던가. 과연 그들 안에 있는것이 내 안에도 있는가. 나의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또 하나의 벽이 무너진다. 이번엔 진짜로 잘지어져 영원하리라 생각했는데, 이미 완성되었다 여겼는데 너무나 쉽게 부서진다. 그 흔적이 부끄러울만큼. 어쩌면 계속해서 벽을 짓기보다 내게 있는 것들을 허물어뜨리는게 삶의 정수에 가깝겠다. 내가 무엇때문에 힘들어하는지 다시 꺼내어보니 높아보였던 그 벽은 문지방만큼 낮아져있다. 겨우 한걸음 내딛으니 넘어간다. 흐리던 공기 속에 선명한 깨달음이 흐르고 있다. 왔던 길로 잘돌아가야겠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_마태복음 5장 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