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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나영 Dec 16. 2021

밀고 밀쳐지는 까만 점

인간과 점 사이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일을 마치고, 경비행기를 타고 들과 호수와 노을을 바라보았습니다. 공원 옆을 흐르는 맑은 강에서 요트 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여유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오스트리아로 이동해서는 맘먹고 시간을 내어, 내가 참 좋아하는 빈에 가서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도 보고, 디렉터스 미팅도 참관했습니다. 입장료가 사실 비싸지도 않습니다. 그리고는 일 년 딱 하루 주어지는 갤러리 무료 관람 혜택도 누렸으니 운이 따르는 여행이었지요.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에 아기자기한 간판과 샵들도 오랜만에 둘러보고, 소금광산이 있는 할슈타트의 고요함에 나를 정화시켰습니다. 그때만큼은 도시에서 쌓아놓은 내 몸속 독소들이 싹 빠져나와 강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이곳에선 눈살을 찌푸릴 일이 없었습니다. 옆에 산책하는 이들과는 눈인사를 살짝 하며, 웃음을 지었고요. 길을 가다 지나치게 가깝게 맞닥트리기라도 하면, 먼저 가시라고 공간을 충분히 확보해 주며, 서로 불편하지 않도록 매너를 지켰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일도 하고, 힐링도 하며 1개월을 보냈습니다.






귀국한 바로 다음날, 피곤했지만 불가피하게 지인을 만나야 했습니다. 만날 장소는 강남역 근처 카페였습니다. 그곳에 가려면 사무실에 주차를 하고는 2호선 전철역으로 들어가, 대각선 방향의 출구로 나가야 했습니다.


그날은 비가 거세게 내렸습니다. 우산을 꺼내 들고, 강남역 10번 출구 쪽으로 향했죠.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평생 살아온 나라의 거의 매일 오가던 거리인데, 그날, 그 순간만큼은, 멀리 떨어져서 내가 속하지 않은 어떤 공간을 바라보는 것처럼 낯설었습니다.


퇴근 시간대였습니다. 출구 도착하기 20m 전부터 백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빼곡히 줄을 서 있었습니다. 1cm 틈도 없이 몸과 몸이 붙어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 밀고, 밀쳐 짐이 당연한 행동으로 용인되고 있었습니다.


미안해하거나, 미안함을 요구할 수가 없는 상태,

사람과 사람 간 최소한 확보되어야 할 간격이 확보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있었습니다.


나도 안으로 밀고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그러나, 당연히 저도 그 경기장에 등판했습니다. 가야 하니까요. 가고 있으니까요. 평소 낯선 사람과의 거리 확보를 내 생명처럼 여기던 나도, 뒤에서 미니, 밀려 들어갔고, 어느새 앞사람을 밀치고 있었습니다. 미안한 맘은 날 민 사람을 이해해주기로 하는 맘으로 상쇄되고 있었습니다.


매너는 사치였습니다.


그냥 그렇게 우리 모두가 힘들고 있었습니다.






포기하고, 밀쳐짐에 몸을 맡기니, 어느새 지하철 입구 바로 앞까지 도달해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또 한 번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우산 전쟁이었죠. 우산을 접으면서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의 물 튀김 공격, 우산을 펴려는 사람들의 우산의 뾰족 공격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특정 구간은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할 만큼 정체되어 있었고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오랜만에 차려입었어도 물이 좀 튈 수도 있죠. 그럼요. 우산도 다행히 겨우 접었습니다.


아. 참. 러시 아워였죠? 양 방향 전철 모두가 방금 이 역에 도착하기라도 했나 봅니다. 사람들이 물 믿듯이 밀고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나오려는 사람들과 어떻게든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한데 뒤엉켜 있는 대치 상태가 일어났죠.


역 안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한눈에 내려다 보입니다. 시야에 까만 점들이 빼곡히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들의 몸은 온데 간데없고, 까만 머리들만 빈틈없이 차 있었습니다. 인간이, 인간의 머리가, 인간의 두뇌가 그냥 까만 점이었습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봐야 하는데, 비(非) 인간인 ‘점’으로 보이게 하는 착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불가피할 경우에는 타인을 힘으로 밀칠 수도 있다는 태도가 취해졌습니다.


비행시간으로는 약 12시간, 공간으로는 약 8,250km 차이밖에 안 나는데, 내 시각, 내 태도, 내가 달라져있었습니다.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그제 오스트리아에 있던 난 매너 있는 사람이고, 비 오는 퇴근길 서울 한복판 강남역 10번 출구에 있던 나는 매너 없는 사람인가? 그 둘은 다른 사람인가? 같은 사람인가?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나는 정말 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난 한 사람인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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