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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나영 Dec 21. 2021

10분간의 고뇌

두려움에 관하여


홋카이도는 보라색 라벤더가 물결치는 여름에 가도 좋지만, 제 기준에서는 겨울이 더 운치 있습니다. 게다가 할 것도 많고, 먹을 것도 많습니다.


크리스마스 때에는 오도리 공원을 구경하고, 연초에는 세계 3대 눈축제로 꼽히는 삿포로 눈축제를 즐깁니다. 료칸에 숙박하며, 대게를 먹고, 온천에도 갈 수 있습니다. 꼭 들르는 칭기즈칸 양갈비 집도 있고, 삿포로 TV타워 근처 라멘 집에서 자판기로 좋아하는 라멘을 골라 먹는 재미도 있습니다.


브라운 계열의 은은한 조명과 치즈 향이 가득한 카페에서는 한쪽 벽면 전체가 유리창으로 꾸며져 있어, 어두운 밤 샛노란 가로등불 아래 선명하게 비춰지는 노란 눈가루들을 바라보며, 치즈 퐁듀를 먹을 수도 있습니다.


추운 겨울에 따스한 낭만을 즐기면서, 미각도 만족시키고, 거리의 부담도 적으니, 한때 자주 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홋카이도는 사실 저에게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청년 시절, 제 인생의 중요한 한 장면을 선사해준 곳이거든요.


이곳에 처음 간 것은 제가 20대 후반이었을 때로, 꽤 오래전이었습니다. 일 때문에 가게 되었는데, 모든 일정을 다 마치고 나니, 반나절 정도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뭘 할까 고민하던 중, 지인들이 스키장을 가자고 했습니다. 친분이 있긴 하나, 서로 스키를 잘 타는지 못 타는지 알지 못할 정도로만 친해던 분들이었는데요.


그래도 그들을 따라나섰습니다. 한국의 대다수 스키 리조트에서 중급 코스 정도는 무리 없이 탈 실력은 되었던 저는 계획에 없던 거지만, "뭐. 어때. 재밌게 타고 오자."란 생각이었습니다. 은근히 들뜨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멋도 잔뜩 부려봤습니다.


드디어, 도착해서 스키복으로 갈아입고, 리프트를 타러 갔습니다. 지인들도 저만큼이나 자유분방한 분들인지라, 자기 레벨에 맞게 이미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저도 별 고민 없이 리프트에 올라탔습니다.


웬일인지 레벨 표시를 유심히 볼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스키장이 다 똑같겠지 하는 생각때문이었을 겁니다. 물론, 일본어를 한 자도 읽지 못하는 것도 한몫했던 것 같고요.


그런데, 말입니다.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다 보니, 리프트 줄 끝이 보이지 않는 겁니다. 종착지가 나올 때가 된  것 같은데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사람들이 붐비던 코스를 지나, 이젠 드문드문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곧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기가 내가 내려와야 하는 코스일 텐데..
너무 가파른 것 같은데..


더 올라갔습니다. 아직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왜 이렇게 사람이 없지..
내가 과연 잘 내려올 수 있을까?


더 올라갔습니다. 펜스가 있다 없다 하더니, 펜스가 보이지 않는 곳이 많아졌습니다. 겁이 한층 더 났습니다.


왜 펜스가 이렇게 없지?
내가 잘 멈추지 못해서, 이탈하면 어쩌지?


더 올라갔습니다. 이제는 눈발까지 흩날리기 시작했습니다. 심장박동 소리가 들릴 만큼 겁이 났습니다.





드디어, 리프트에서 내렸습니다.  턴 하여 내려가, 출발 지점인 언덕에 서 있었습니다. 제 앞뒤로 리프트에 탔던 사람들은 주저함 없이 언덕 밑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한두 명씩 사라지는데, 저만 그 언덕에 계속 서있었습니다.


경사가 가팔라서, 언덕 밑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가늠이 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A자를 힘껏 유지하여 속도를 줄이는 연습을 많이 해오긴 했지만, 이렇게 가파른 코스에서 타본 경험이 없었습니다. 미친 듯이 달리다 눈밭에 꼬꾸라질 수도 있고, 펜스도 없으니 경로를 이탈해서 어딘가에 부딪혀서 다칠 수도 있습니다.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눈발이 뿌옇게 흩날리고 있었습니다. 제 주변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습니다. 리프트 간격이 짧지 않나 봅니다. 안내원조차 없습니다. 전 이 언덕을 넘어서 내려가느냐, 아님 포기하고 리프트를 타고 내려가느냐의 기로에 서있었습니다.


전 그렇게 10분을 서있었습니다.




그러다, 결심했습니다.

내려가 보기로요.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내가 지금 이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포기해 버린다면, 앞으로도 이 코스는 계속 내가 못 타는 코스가 되어버린다는 생각, 언제인가 어딘 가에서 이런 난이도의 코스를 다시 만난다면, 지금처럼 또 피하게 될 거란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피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맞닥트려 보기로 했습니다.

넘어져서 아프고, 힘겹더라도, 견뎌보기로 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더라도, 최대한 배운 대로, 천천히, 굴러서라도 내려가 보자고 결심했습니다.


...


그리고는 

서서히 

출발했습니다.




언덕을 넘자마자 역시나 바로 넘어졌습니다. 가팔랐습니다. 무서웠습니다. 그래도 일어나야만 했습니다. 나 혼자였거든요. 다행히 그간 배운 게 있어서인지 다시 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정비하고 아주 천천히 내려갔습니다. 그러다, 또 넘어졌습니다. 하지만, 넘어져도 다치지 않으니, 이젠 넘어지는 것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또다시 천천히 출발했습니다.


한 60~70m 정도 내려갔을 때였습니다. 역시나 넘어져 있었습니다. 내 몸과 스키 도구는 차가운 눈 범벅이었습니다. 뺨과 손은 동상이라도 걸린 것처럼 꽝꽝 얼어붙었습니다. 그래도 눈을 다시 털고, 출발할 정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늘에서는 눈발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다른 장소에서 보았다면 아름다웠을 이 눈발이 그냥 차갑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때 저쪽 오른쪽에서 한 명이 빠르게 다가왔습니다. 바로 스키장 가드였습니다. 그 가드는 제가 안쓰러웠는지, 제가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고서는, 스키 탈 때 유의해야 할 점을 일본어로 열심히 설명했습니다. 그는 영어나 한국어를 못하고, 저는 일본어를 못했으나, 표정과 몸짓만으로도 소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내 앞에서 천천히 타고 내려갈 테니, 그 길 그대로 따라와 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출발했습니다. 그가 타고 내려간 길만 보니,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두려움이 없어지니, 몸에 긴장이 풀렸습니다. 그러니, 제 몸짓이 한층 가벼워졌습니다.


가드는 방향을 좌로 크게 틀어 가다가, 우로 크게 틀어 가다가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니 경사로가 가팔라도, 그렇게 가파르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따라가다 보니, 어느샌가 제가 평소에 타던 중급 레벨의 경사로가 나왔습니다. 이제는 제가 독자적인 길을 만들어 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끔은 기술까지 부리고 있었습니다. 재미도 붙었습니다. 그렇게 좀 탔을 뿐인데, 어느새 전 코스 출발 지점으로 다시 돌아와 있었습니다.




가드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습니다. 그리고는, 전 제가 내려온 코스를 돌아다보았습니다. 제가 포기했으면, 타보지 못했을 그 가파르고 긴 코스를요.


전 지금도 두려움이 들어 멈칫하게 되는 순간에 봉착하면, 그 눈발이 흩날리던 언덕에 혼자 서있던 저를 떠올려 봅니다. 두려움의 순간에 땅을 힘껏 찍고, 이를 버팀목으로 제 몸을 밀어내던 그 순간의 제 마음을요.  


두려움을 피하지 않고 마주할 때, 우리는 엄청난 성장과 의외의 즐거움을 얻게 되기도 합니다. 전 이 날, 전문 가드의 일대일 레슨을 무료로 임팩트 있게 장시간 받았고요. 일본의 올림픽 출전 스키 선수들의 훈련 코스를 완주해 보았다는 성취감도 잠시나마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두려움을 피하지 않았던 제가 저는 너무 대견했고,

이 순간은 저에게 크기와 상관없이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두려움을 피하지 않고,

스스로를 믿어 보는 것,

스스로에게 기회를 줘 보는 것,

설령 실패하더라도 그러한 시도를 한 스스로에게 대견하다고 칭찬해주는 것.


이 모든 것은 참 기분 좋고, 가치 있는 일입니다.


이 스키장 언덕에 딸아이와 함께 선 적이 있습니다.

딸이 두려움이 닥치는 순간에 피하지 않는 멋진 여성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가자고 했었습니다.


올해 마주한 첫눈이

삿포로 어느 스키장에서 내렸던 

두려움 속에서의 작은 결단을

문득 떠올려주어,

이런 글과 그림을 적어봅니다.


참 가슴 벅찬 하얀 밤입니다.





P.S. 스키장에서 무리하게 타시다가 다친 분들을 보았습니다. 한 번의 실수로 오랫동안 허리가 아프신 분도 주변에 계시고요. 상기 글과 모순이 되긴 하지만, 이 점은 명시해야 할 것 같아요. 건강과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모험도 이를 담보로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Photo by Carina Tysvær on Unsplash



All artworks copyright ⓒ Selah.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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