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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나영 Dec 29. 2021

쿨하게 믿고  시크하게 기다리기

책임져야 하는 이를



사회초년생 때였습니다. 입사하자마자, 글로벌 마케팅 캠페인의 일환으로 진행되던 글로벌 PR 프로젝트에 바로 투입되었습니다. 해외 대행사 선정 RFP 작성, 계약, 홍보대사 계약, 언론관계, 콘텐츠 제작, 전략 지역의 글로벌 PR 캠페인 기획 및 실행 등을 담당하게 되었죠.


지금은 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에 무리가 없고, 각 현지 지사들의 역량도 높아, 본사보다는 지사가 더 많은 책임과 권한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본사에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지사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마케팅 및 브랜딩 툴을 지원하고, 통합 평가를 하는 동시에, 직접 몇 개국을 전략 지역으로 선정하여, 본사 차원에서 좀 더 적극적인 마케팅 캠페인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비즈니스나 플랫폼의 글로벌 론칭에는 지금도 글로벌 기업 본사 팀이 나서듯 말이죠.


새로운 회사에 입사해서, 새로운 '그 일'을 맡은 지 한 2~3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테스크가 하나 주어졌습니다. 보도자료를 완성하여, 다음날 새벽부터 기사화되는데 문제없도록, 주요 글로벌 미디어에 이를 직접 배포해줄 우리 PR 파트너사와 각 현지 언론에 이를 배포해줄 전 세계 수십 개국의 지사 PR 담당자들에게 늦어도 오늘 새벽 3시까지는 최종본을 메일로 송부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2~3년 차 PM으로 글로벌 기업의 국내 마케팅 관련 다른 업무는 어느 정도 해본 상태이긴 했지만, 해외 언론에 보낼 기사를 내 손으로 직접 작성하여 보내는 일은 살면서 처음 해보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제 사수인 차장님께서는 대소롭지 않은 듯, 저에게 그 일을 맡기고는 쿨하게 이미 여섯 시에 칼 퇴근하셨습니다.


그래도, "파트너사 (글로벌 PR 전문사)가 우리가 제공한 가이드라인대로 초안을 잘 작성해 오겠지."란 생각으로 그보다 더 촌각을 다투는 업무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일에 집중하다 보니, 이내 밤 10시가 되어 있었죠. 시간이 벌써 그리 지나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보도자료 초안이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배포 데드라인은 정해져 있는데 말이죠.


글로벌 캠페인 업무를 볼 때는 시차가 다른 지역과 커뮤니케이션해야 하기 때문에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파트너사가 특히 타 국가의 글로벌 전문사라면, 상대방 업무 시간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정확하게 결과물을 전달해 주지 못할 수 있음도 미리 감안해야 하고요.


그때도 그런 경우였습니다. 제가 10시라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메일이 들어왔습니다. 그 보도자료 초안을 받아 들고는 검토하는데, 맘에 안 드는 겁니다. 실제로 네이티브 스피커라고 영어 글을 잘 쓰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글이란 알리고자 하는 내용을 얼마나 정확히 알고, 이를 목적에 맞게 얼마나 잘 표현하고자 고민하고, 애썼느냐의 문제인데요. 이는 단어 하나하나 선정에도 묻어납니다.


그래서, 손보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이 모든 것을 완성하니, 새벽 1시가 넘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150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수신처들에 삽입 완료했습니다. 메일 바닥에 당부의 글도 썼습니다. 이제 SEND 버튼만 클릭하면 됩니다.




지금 그 넓은 사무실에 저 혼자입니다.  그 일은 내 일이기 때문에 선배도 동료도 다 퇴근하고 없었습니다. 늦은 밤에 알아서 보내라고 하시던 사수인 차장님께 전화드려 여쭤볼 수도 없고, "잘 되었으니 괜찮아. 그냥 보내 버려."라고 동조해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지금처럼 미디어 환경이 디지털화, 다변화되어있지는 않은지라, 한번 뿌리면 수정이 용이하지 않았습니다. 기자회견을 하는데, 모든 게 완벽해도 오타 하나, 멘트 하나, 브랜딩 왜곡 하나, 출연진 실수 하나에도 그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경우를 자주 보아왔습니다. 이 A4 2장이 채 안 되는 이 보도자료에 어이없는 실수가 하나라도 포함되어 있으면, 셀 수 없이 많은 기사들에 그 실수가 고스란히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사는 다음 날 미디어 클리핑 결과물에 고스란히 수집될 예정이었습니다.


오로지 나 밖에 없었죠. 실수를 잡아낼 사람은요.

그 짧은 보도자료를 보고, 또 보았습니다.


그렇게 짧은 글을,

이미 완성한 글을,

정말 수정할 게 없어 보이는 글을,

한 시간 째 째려보고 있었습니다.


괜찮겠지?
그래, 문제 없잖아.
문제 될 게 뭐 있어.
없어.
정말 없나?
없어.
뭐 잘못되면 책임지면 되지.


이런 말을 혼자 되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드디어 클릭을 날렸습니다.


그 순간은

제 손으로 마무리 지은 보도자료를

제 이메일 주소로

제 이름으로

전 세계에 뿌린 첫 번째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기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런 류의 일은 이제 어려운 일이 아닌 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현장에 나갔습니다. 전세기를 타고 수십 개국을 돌아다녀야 했습니다. 한 국가 한 도시에 내려서 업무를 하고, 다시 전세기를 타고 다른 국가 다른 도시에 내려 업무를 하고, 또다시 타고 또다시 내리며, 본사 차원의 PR도 진행하고, 지사 업무도 지원하는 거였습니다.


그러니, 데드라인이 아주 분명한 일을 한 겁니다. 제 할 일을 제때에 끝마치지 못하면, 그 국가 업무를 펑크내고 비행기를 타거나, 아님 그 국가 업무를 챙기느라 비행기를 놓치면, 다시 타 국가에서 조인할 때까지 프로젝트를 망쳐 버리는 거였죠.


차를 타고 이동하고, 사람을 만나고, 콘텐츠 관리하고, 인터뷰하고, 미디어 커뮤니케이션하고, 최종 자료 선택하고, 지사에게 공유하고, 대변인 관리 등을 담당했어야 했는데, 이는 난이도가 높은 업무는 아니었지만, 짧은 시간 동안 지체 없이 착착 진행되어야 하는 빡빡한 스케줄의 업무였던 것은 맞았습니다. 또한 누구도 해보지 않은 업무였고요.


업무 분장 상 이를 혼자 온전히 담당해야 했습니다. 처음엔 관련자들이 함께 있었지만, 전세기를 타고 장기 출장을 가야 했던 사람은 저 혼자였기 때문입니다.




뉴질랜드에서 전세기가 떠나기 약 30분 전이었습니다. 그런데, 같이 비행기를 탈 홍보대사가 안 보이는 겁니다. 그리고, 선택해서 공유해야 할 영상, 사진자료가 아직도 제 손에 오지 않은 겁니다. 제 짐은 엎친데 겹친 격으로 렌트한 차와 저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콘텐츠를 전달해주어야 할 담당자도 오고 있다는데, 자꾸 늦어집니다. 이제는 연락도 닿지 않습니다.


전 곧 떠나야 하는데 말입니다. 홍보대사를 못 태워도 문제, 자료를 선택해주지 못해도 문제, 이를 현지 담당자에게 공유하지 못해도 문제, 본사나 대행사, 미디어에 전송하지 못해도 문제, 제 짐을 못 실어도 문제... 전화기도 잘 안 터져 문제... 물어볼 사람도 없어서 문제...


정말이지 머리가 하얘졌습니다. 뭐 하나라도 펑크 났을 때, 발생할 해프닝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사수인 차장님께 전화를 했습니다. 상황을 긴박하게 전달했죠.

그러자, 차장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걱정 마. 너 잘 하잖아.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비행기 타. 괜찮아. 내가 책임질게.


전화를 끊고, 숨을 고르기 시작했습니다.


자... 생각이란 걸 해보자...
그래... 최악을 막아보자...
우선순위를 매기자.

 

그래서, 움직임을 멈췄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내가 꼭 해야 하는 것과 염치없지만, 잘 모르는 다른 조직, 다른 팀에게라도 부탁할 것, 그리고 꼭 안 하면 안 되는 것과 안 해도 피해가 적은 것을 머릿속으로 정리한 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늦게 도착한 스태프들에게 1차로 콘텐츠 고르게 했고,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문제가 안될 만한 것을 선택해놓고,

추가로 찾아보게 했습니다.


만에 하나 내가 마무리 못질 경우를 대비해서 본사 스태프들과 대행사 직원분들께 대기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일부는 그쪽으로 보내서 처리하도록 했습니다.


미안하지만, 안 친한 한참 위 선배에게도 짐을 가져와달라 부탁했습니다.

철판을 깔은 거죠.


사라진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전화를 몇 사람에게 돌려주기를 부탁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모든 일들은 바로 비행기 아래에서 진행했습니다.

여차하면 바로 떠날 수 있도록 말입니다.


타인들에게 자기 할 일도 혼자 처리 못하는 이미지로 비칠까 하는 고상한 걱정은 할 수 없었습니다.

이 문제를 잘 해결하고, 비행기를 타는 것에만 집중했습니다


그러니, 하나 둘 완료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전 모든 일을 처리하고 비행기에 홀가분하게 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류의 일은 이제 당황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수없이 더 큰 책임져야 할 일들을 하는 나이가 된 지금,

그 메일 클릭 한 번에,

그 비행기 시간 맞추는 것에,

그렇게도 고민하다니 피식 웃음이 나긴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소소한 순간들이 있었기에,

더 큰 책임을 질 수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누군가의 사수가 되기 시작하면서 전 깨달았습니다.

당시 제가 사수를 참 잘 만났었다는 것을요.


차장님은 아무리 경력자라 할지라도 해당 메일 루프 속 사람들에게 한 번도 보도자료를 완성해서 보내본 적 없는 신규 입사자에게 그 일을 맡겨 놓고는 쿨 하게 6시에 퇴근하셨습니다. 제가 현장에서 큰일이 난 것처럼 걱정했을 때, 별 일 아닌 것처럼 시크하게 답하셨습니다.


나중에 제가 그 차장님 연차 정도 되었을 때, 이 프로젝트 관련해서 둘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사실 본인도 처음 접하는 프로젝트여서 걱정되었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몇 개 국가 정도는 펑크가 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한 국가도 펑크 내지 않았다고. 그렇게 잘 마무리해서 다행이었다고요.


그런데, 차장님은 당시 그런 티를 전혀 내비치지 않으셨습니다.

절 믿어주신다고 제가 믿게 끔요.


차장님이 참 대단해 보였습니다.

사실 나에게 피해가 될 수도 있는 일을

쿨하게 믿고 시크하게 기다려주는 거.

요거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제가 간부가 되었을 때, 한 사원을 제 팀으로 받아야 했습니다. 경력이 1~2년 정도 되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렇게도 다들 그 친구가 "센스가 없다, 자질이 부족하다,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 된다."라고 저에게 미리 이야기하며 편견을 심어주었습니다.


제 선택이 아니라, 무조건 받아야만 하는 직원이라면 일단 편견 없이 백지상태에서 바라보려고 노력하던 저는 실행보다는 기획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아이디에이션 해보라고 권했고, 그 친구의 아이디어를 칭찬해주었고, 다소 비현실적인 부분을 현실적인 안으로 발전시키도록 튜닝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 외 나와 타 팀원들의 손길이 묻은 우리의 안이 완성되었을 때 이 친구가 PT를 하게 했습니다. 제가 그를 믿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타 팀의 경우, 팀장이나 대선배들이 피티를 하는데, 우리의 안은 신입인 그 친구가 피티를 한 것입니다. 잘 안되면 제가 옆에서 백업해줄 맘을 갖고요. 


물론, 잘 했습니다. 그 이후 자신감이 붙었는지, 그 이후로는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스스로 더 기획안의 수준을 높이려 애를 썼습니다. 자신이 낸 아이디어가 실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신이 난다고 하더군요. 제가 자신을 진심으로 지원하고 믿는다는 것을 아는 것 같았습니다.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기 전입니다.

이런 초심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클릭하기 전 내 책임에 대하여 생각했던 마음,

자존심 버리고, 우선순위를 매긴 후, 집중하여 매진하던 마음,

불안해도 믿어주는 마음,

대신 책임져 주는 마음 말입니다.


최근 저는

인생의 중요한 기로에 놓여있는

저의 가장 소중한 딸에게도

이를 지키지 못하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쿨 하게 믿고,

시크하게 기다려주지 않는 저를요.


사랑한다는 이유로,

오히려 제가 더 걱정하는 기색을

내보이고 있더라고요.


반성이 참 많이 됩니다.





PS.


生而不有 (생이불유)

為而不恃 (위이불시)

長而不宰 (장이부재)

是謂 玄德 (시위 현덕)


낳되 소유하지 않고,

위하되 의지하지 않으며,

기르되 지배하지 않으니,

이를 현묘한 덕이라 부른다. 


(도덕경, 제 5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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