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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나영 Jan 06. 2022

셀라 정원

어떤 사람이 되고 싶나요?


영국에서 공부할 때였습니다. 제가 다닌 비즈니스 스쿨에서는 OBPPD라고 불리던 <Organizational Behaviour and Personal and Professional Development; 조직 행동 및 퍼스널, 프로페셔널 개발> 과목을 필수로 수강해야 했습니다. 주로 조직 관리 및 리더십 함양에 관한 과목이었는데요. 교수님 강의 외에도 나 자신의 적성과 조직에서의 내 리더십 스타일을 분석한 후,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참여 활동들이 병행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6~7명씩 팀을 짜줍니다. 팀을 짤 때에는 MBA 오기 전에 종사했던 전문 분야를 감안하여 마케팅, 재무, 인사, 회계, 영업, IT 등 각 분야 종사자들이 한 팀에 섞일 수 있게 합니다. 또한 150명 이상의 학생들이 28개국에서 왔으므로, 될 수 있으면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팀 내에 배치됩니다.


이렇게 구성된 팀에게는 팀플이 정기적으로 주어집니다. M&A 레터 쓰는 것부터 비즈니스 리스트럭쳐링, 신규 시장 진출 전략 수립까지 주제는 다양했는데요. 이를 위해 팀원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토론하고, 역할을 배분하고, 합의 하에 결과물을 산출하게 됩니다.


이 활동을 꾸준히 하다 보면, 팀에서 내가 어떤 위치에서 어떤 역할을 주로 담당하고 있는지 알게 됩니다. 내가 생각하는 팀에 대한 내 기여도와 팀원들이 생각하는 내 기여도 사이에 간극이 있는지도 확인하게 됩니다. 이러한 류의 테스트는 많은 기업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실시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조직 행동 분석은 MBTI, 벨빈, FIRO-B 테스트 결과 분석 이상으로, 저 자신을 들여다보게 하는 유용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수업에서 더 값진 깨우침은 다른 두 가지 이벤트를 통해 얻었습니다. 지금껏 영향을 크게 미치고 있는 준거이자 자극인데요.


첫 번째는 선배들과의 만남 시간이었습니다. 그날 방문했던 선배들은 주로 컨설팅 기업이나 소비재 기업 고위직 임원이었는데요. 그중 선배 한 분만 어린이 관련 NGO 대표였습니다. 워낙 비즈니스나 커머셜 쪽에만 관심 많던 저에게는 꼭 만나보고 싶었던 분은 아니셨지만, 제 순서가 되어 자연스럽게 그분 앞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 선배님은 당시 연세가 오십은 족히 되어 보이셨는데, 눈가 주름부터 웃으시는 입술, 미끈하게 정리된 어깨선에서까지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역시나 카리스마 있게 제가 앉자마자 바로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꿈이 뭐예요?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꿈이라... 향후 희망 진로를 묻는 것도 아니고. 음... 그냥 궁금한 것 물어보라고 하시지... 갑자기 이런 형이상학적 질문을...


그러다, 아니 그래서, 전 마케팅도 해보고 영업도 해봐서 더 조직 내 체계(hierarchy)에서 계속 올라가려면 재무와 인사를 모르면 안 된다는 생각에 MBA를 결심했던 당시 제 마음대로 답을 드렸습니다.


전문경영인, CEO가 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분의 눈가와 입가에 맺혔던 웃음이 사라지더군요. 이젠 그 카리스마에 다소 긴장이 되는 것도 같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전문경영인이란 타인으로부터 주어지는 직위일 뿐입니다.
자신의 삶을 타인의 평가와 결정에 맡기는 삶은 수동적인 태도 아닌가요?
경영인이 되어서 꼭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요?
꿈은 직위가 아니라 그 직위를 통해 자신이 인생에서 반드시 성취하고 싶은 일이어야 하지 않나요?


처음에는 물론 당황했지만, 이내 제 맘에는 '가벼움'이란 단어가 가득 채워졌습니다.


제 답변의 가벼움,

삶을 대하는 제 태도의 가벼움,

저 자신의 가벼움이 말이죠.


열심히는 살았으나, 지금껏 그렇게 추구해온 직위와 성공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하지 않았던 제 자신의 민낯이 드러난 것만 같았습니다. 제 삶을 돌아보니, 당장 앞에 놓인 과제에만 몰입해왔던 것 같았습니다.


그녀와의 대화는 제 삶을 다시 점검하는 촉매제가 되어 제 커리어의 방향을 흔들리게 하지 않는 중요한 이벤트가 되어주었습니다.

 



두 번째 이벤트는 저 자신에 대한 리포트 과제였습니다. 수업의 평가 항목에서 이 리포트가 80% 정도 차지할 정도로 비즈니스 스쿨에서 중시하던 과제였죠.


MBA 마지막 학기에 과정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원래 어떤 사람이었고, 이번 과정을 통해 어떤 깨달음을 얻었고, 이로 인해 향후 어떤 리더로 살아갈 것이라 각오를 다졌는지'에 관하여 그간 진행했던 각종 테스트, 강의, 그리고 팀플을 통한 자기 분석 결과를 토대로 셀프 통합 분석 리포트를 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전 이 리포트에서 최고점을 받았습니다. 과목별 등수를 직접 받아보는 게 아닌지라 100% 확신은 없지만, 매 학기 매 과목마다 동기들 성적 비교를 다 해보는 친구들이 해주었던 이야기입니다. 다들 읽어보고 싶다고 찾아오기까지 했으니, 대략 고점은 맞는 것 같습니다.




전 제 자신을 정원으로 치환했습니다.


과거 전 사람도 브랜드라고 생각했죠. 스스로도 매력적인 브랜드가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을 때 흠결이 없도록 철저히 관리되어, 지불되는 가격 이상으로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에 책임감도 큰 편에 속했습니다.


아주 잘 다듬어진(trimmed) 정원처럼 말입니다. 마치 네덜란드 코이켄호프 공원이나 캐나다 부차트 가든처럼 깔끔하게 군더더기가 없고, 생생하고 화려하고 다채로워, 다시 찾고 싶은 정원처럼 말이죠. 그래야 나를 찾는 곳이 많아질 것이고, 내가 선택할 옵션들이 늘어날 테니까요.


그래서, 어릴 적부터 그렇게도 롤 모델을 찾아다녔습니다. 지금처럼 여성 리더들이 많지 않았던 시기인지라, 미국 최초 여성 국무부 장관 마들린 울브라이트, IBM CEO 칼리 피오리나의 인생 스토리를 애써 찾아 읽었습니다. 한국에서도 기회가 되면 먼저 길을 가신 분들을 직접 자주 찾아뵙기도 했죠.


그런데 깨달았습니다. 롤 모델을 쫓아하려고만 하지 말고, 자아 그리고 자신의 리더십 스타일에 대하여 스스로 정립해야 한다는 것을요. 자신의 특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자신을 성장시켜야 한다는 것도요.  


우리는 저마다의 특징, 처한 상황, 삶의 가치관과 소명의식도 다르기 때문에 남을 따라 하고 싶어도 그대로 할 수도 없고, 설령 비슷하게 따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다움이 아닐 수 있습니다. 불편할 수도 있고요.


또한, 정원에는 잔디가 촘촘히 깔려 있을 수도 있지만 때로는 빈틈도 있을 수 있고, 잘 다듬어진 곳이 있다면 관리 못해 덥수룩한 곳이 있을 수도 있으며, 계절에 따라 피는 꽃이 있으면 시드는 꽃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적어도 정원을 1년 365일 24시간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게 유지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희생을 불균형적으로 필히 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원이 정원일 수 있으려면, 한편에 가드닝 도구도 있어야 할 것이고, 아이가 있다면 외관상 좋지 않더라도 놀이터를 마련해야 할 것이고, 내 취향이 아니더라도 나와 함께 하는 이들이 좋아하는 나무로 바꿔 심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정원 밖에서 바라볼 때 매력적인 정원이 되려고, 나라는 정원에 들어와 있는 소중한 이들을 불편하게 하면 결국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정원 안에서 지내는 모두가 덜 행복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마치 훼손될 까 봐 관람객의 손이 닿지 않게 하려고 펜스를 쳐놓은 갤러리 내 고가의 예술작품처럼 제 둘레에 울타리를 높게 쳐놓아, 그 밖에서만 관람이 허용되는 정원이 되면 정원이 아니다 싶었습니다. 문이 활짝 열려있어 구석구석 보기 싫은 부분도 노출되고, 방문자들이 만지고 밟고 뽑아서 자주 훼손이 될지라도, 잠시 휴식이 필요한 누군가, 잔디에서 뛰놀고 싶은 누군가, 힐링이 필요한 누군가가 언제든지 들어올 수 있는 정원이 진정한 정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죠.




그래서, 전 맘먹었습니다.

이제는 다른 정원을 똑같이 따라하려 하지 말고, 나 다운 정원이 되기로요.

세상에서 유일한 나 다운 정원이 말이죠.


각오도 다졌습니다.


제 흠결을 드러내더라도, 

혹시 제가 손상이 되는 피해를 입더라도,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문을 활짝 열어놓고,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은 

함께 할 수 있는 정원이 되기로요.


이것이 그 고점을 받은 리포트의 결론이었습니다.





PS.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에는 <더 벨스(The Bells) 공원이 있습니다. <캄바나이트(Kambanite>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1979년, UN에서 국제 아동의 해로 선언하면서, 이 공원에서 전 세계 어린이들 대상으로 하는 국제 어린이 아트 페스티벌이 개최되기도 했는데요. 이 공원의 특이점은 유럽에서 가장 큰 타악기, BC 4세기 제작된 가장 오래된 레플리카 종, AD 11세기 가장 오래된 오리지널 종을 포함하여 전 세계로부터의 133종류의 종이 전시되어 있다는 겁니다. 


제가 이 공원에 방문했을 때, 물론 한국 종도 있는지 열심히 찾아보았답니다. 네. 있었습니다. 이 기쁨과 더불어 제가 느낀 또 하나의 깨우침은 바로 각국에서 온 백 개가 넘는 종들의 모양과 크기가 다 제각각이라는 겁니다. 종 하나하나의 제조 목적, 공정, 역사, 가치, 소리가 모두 다르겠지요. 하다못해 인간이 만든 종도 이렇게 다른데, 우리 모두가 똑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우리 모두 자기다움을 찾아보도록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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