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제어 Mar 27. 2024

<우연과 운명>

우연과 운명 무엇을 믿으십니까?

2024.01.07의 일기


 감기에, 잠도 얼마 못 자고 나가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그날따라 일이 다 몰렸다. 연신내점은 앓던 이 같던 화장실 샤워실 보수 공사가 막바지라, 영등포점은 창문 샷시 교체와 에어컨 배관 설치 때문에 가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수입 판매 관련해서는 관세사의 무책임한 일 처리로 세율 적용이 잘못된 게 있었는데, 

포워딩 업체와 관세사 사이에서 일을 서로 미루고 있었다.

답답해 내가 전화를 했다. 달래기도 하고 화내기도 하고 전화만 몇 통을 했는지...

오전밖에 안 끝났는데 통화 목록을 보니 37통이 오고 갔었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내가 20살부터 21살이 되던 3월까지 알바로 일했었던 술집 사장님께 갑자기 전화가 왔다.

일 이년에 한 번 정도 안부를 물어오는 사이였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뭐 하고 지내냐. 잘하고 있는 것 같아 보기 좋다. 넌 언제나 잘할 거다. 천천히 잘해봐라.

38번째 통화였지만,

즐거운 추억의 대화도 있었고, 지쳐있는데 마침 힘을 얻는 통화였다.

난 칭찬과 격려에 약한 사람이긴 한가 보다.

오후는 집에 가서 좀 쉴까 했었는데...

결국 더 열심히 일하라는 운명의 장난인가. 


 우리는 매일 우연의 연속, 운명의 장난 같은 일들을 마주친다.

'우연'과 '운명' 두 단어는 과학과 비과학을 떠나,

내 존재를 한없이 작아지게 만드는 단어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운명은 닫혀있어, '끝'이라는 단어와 비슷한 것 같고,

겸허히 받아들이라는 경고문 같기도 하다.

낭만적이기도 하지만,  시련이 있는 단어 같다.


 우연은 열려있어, '시작'이라는 단어와 비슷한 것 같고,

두려움과 설렘이 동반하는 단어 같다.

우연은 운명보다 한 스푼이라도 나의 자유의지가 들어 있는 것 같아,

차라리 우연을 믿고 싶다. 

저 멀리서 손을 흔들어대며, 

내가 여기 있다고 증명하려는 것처럼.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우리의 만남은 운명이었다.

우리의 헤어짐은 우연이었다.

우리의 헤어짐은 운명이었다.

우리의 만남은 운명이었고, 그것은 행복이었다.

우리의 만남은 운명이었고, 그것은 불행이었다.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었고, 그것은 행복이었다.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었고, 그것은 불행이었다.


 그토록 뜨거웠던 지난 어느 여름날. 

필연과 운명을 믿는 사람에게, 난 운명을 믿지 않다는 차가운 말을 했다. 

운명 같은 헤어짐이었다.

난 상처를 줬다. 이기적 이게도 그 상처를 잊기로 했다. 

이기적 이게도 서로의 상처에 매몰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21살이 되던 해에 나는 군 입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연히' 하와이에서의 서핑 사진을 봤다. 모아놓은 돈으로 하와이행 티켓을 끊었다.

차라리 그 돈으로 서울 가서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하나씩 하다가 입대를 해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티켓을 취소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노래 레슨을 받아보고 싶어서, 음악 커뮤니티에서 보컬 선생님을 찾았다.

학교 졸업을 다 마치고 군대를 다녀오느라, 또래보다 늦게 전역한 26살의 남자였다.

자기 손으로 방음 패드를 붙여가며 작업실을 만드는 중이었다. 본드 냄새가 진동했다.

아무것도 없는 시설에서 간단하게 노래 테스트와 상담을 받았다. 

사람이 좋아 보였다. 형이 맞지만, 형 같음이 느껴졌다.

난 사람을 잘 본다는 촉을 믿으며, 바로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연극을 시작하게 되어, 2달도 제대로 수업도 못 받고 입대를 해버렸다.


 그 보컬 선생님과 그 후 일 년에 한 번씩 연락을 했다. 내가 전역한 후에 서울에서 알바 자리를 소개받기도 했다.

내가 27살이 되던 해에, 

그 사람, 진식이 형과 나는 우연한 통화를 하며, 우연히 각자 상황의 답답함을 토해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울타리를 만들자고 이야기하며, 둘이 일을 시작했다.

지금은 서로 제일 믿는 사람 중 한 명이 되었고,

우리는 예민해 잠에 잘 못 드는 성격도, 체질도 비슷한 점이 많다. 

운명일까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 확률을 생각해 보기도 한다. 

사칙연산도 제대로 못하면서 통계와 확률을 논하는 게 웃기긴 하다. 

결국 떠돌다 도착하는 생각은 운명같이 높은 확률의 우연들이었다.

그냥 말장난이고, 결국 우연이란 뜻인가. 

사실 뭐가 중요한 걸까 싶기도 하다.  


 어제는 내 의지였던, 너의 의지였던, 마음이 더 크든 작든, 

우리는 약속을 잡았다. 밥을 먹고 나왔는데, 

우연히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올해의 첫눈이었다.

손을 펴 손바닥 위에 눈을 올렸다.

눈이 정말 눈 같아서,

영화 세트장에서 뿌려대는 눈 같기도 했다. 

눈을 맞으며 유난히도 골목이 많은 곳을 걸었다.

동시에 머리에 비듬 좀 털어내라는데 농담을 했다.

눈이 더 많이 와서 이곳에 갇혀버리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단 생각을 했다.

내일은 감기가 더 심해질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면서도,

둘 다 심한 감기를 앓는다면 그건 운명이겠지. 생각했다.

오늘은, 어제 눈을 더 맞고 아파버릴 걸 그랬나 생각도 했다.



+



게슈탈트 붕괴가 와서

우연, 운명, 눈이라는 단어들이 내가 알고 있는 단어가 맞나....

작가의 이전글 <불리는 이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