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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립소 Dec 12. 2022

올 한 해를 보내며...

연말 파리 산책 기록

그저 일주일에 네 번 학교를 나가며 일상을 보낼 뿐인데, 이토록 할 일이 많은지 미스터리다. 마지막 글 작성일에서 무려 3주나 지났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고, 2022년이 보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도 놀랍다. 

(자발적) 안식년 동안 하고 싶은 거 다 해보자는 당초 목표는 자꾸 뒤처지는 학업 때문에 쉽지 않다. 처음 이곳에서 유학했을 때 보다 훨씬 가벼운 공부인데도 그때보다 나이가 더 들어서 그런가. 지금이 더 어려운 것 같다. 물론 그때도 여러모로 힘들었을 거고 거의 십 년 전 기억들이라 왜곡됐을지도 모른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치하는 괴로움은 분명히 기억한다. 내 부족함을 인정해야 는 것! 생업 생활로 잊고 있던 작은 패배감이 스멀스멀 올라와 좀 놀랬다.


한 달의 며칠은 호르몬 장난으로 감정이 들쑥날쑥한데, 그놈의 요동치는 호르몬은 겨울에 들어서자 생체리듬까지 변화시켜 독감으로 진화하더니 몸도 고달프게 만들었다. 지난달과 이번 달 일주일 정도는 꼼짝도 못 한 채 오환과 고열에 누워있었는데 그때마다 묘한 죄책감도 조용히 스며들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그때를 제외하면 나름 바쁘게 보낸다고 보내는데 희한하게 게으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왜 그럴까 하고 생각해보면,  30분 단위로 쪼개가며 계획하는 생활과 대비 노력(?)에 대한 성과가 아직 나타나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이놈의 성과주의에 길들여진 몸은 꾸준함을 자꾸 좀먹게 한다.


뭔가 부정적인 근황만 죄 나열한 것 같지만 사실 나는 이 안식의 시간이 너무 소중하고 하루하루가 행복하다. 이번이 지나면 내게 이런 기회가 없을 것 같아 눈물 나게 아까운 시간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을 뿐이다. 암튼, 연말맞이 일상 반성 말고도 굳이 포스팅을 하고자 했던 다른 목적은, 학교 야외 수업 때 들른 연말 산책 코스를 더 오래 기억하고자 기록하고자 한 건데  자꾸 일기처럼 감정적인 글이 돼버려 민망하다.

생 자끄 타워 Tour Saint-Jacques, 파리의 중심 리볼리 길을 수십 번도 더 지나며 보는 랜드마크인데 이 생 자끄 탑이 있는 스퀘어에 들어와 볼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파리 거주 십몇 년 만에 야외 수업으로 처음 들어왔다니 이 무심함을 어쩔까. 언뜻 보아도 최근의 스타일은 아닌 이 탑은 본래 중세 초기에 축성된 생 자끄 라 부셰리 Église Saint-Jacques-la-Boucherie 교회의 종탑이다. 프랑스혁명 때 교회 건물은 소실되고 이 종탑만 남아 후에 명칭도 뚜르 생 자끄로 바뀌었다. 

도심의 중심 리볼리 길 거기서도 정중앙에 축성된 교회지만 당시 그 지역은 큰 정육, 도축 상업지역이어 교회 성인 이름과 함께 지역 특징을 대표하는'라 부셰리 la-Boucherie'라는 이름이 함께 붙었었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 성지순례 코스 중  생 자끄 (영어로 St. James) 루트인 투로넨시 코스 via Turonensis의 시작 지점이기도 하다. 11세기 축성 때부터 18세기까지 여러 차례 증축된 오랜 유럽 교회 건물양식과 마찬가지로 생 자끄 탑 역시 세대를 관통한 여러 양식이 섞여있지만 무엇보다 더 생 자끄 탑은 후기 고딕의 « 불꽃 양식 »을 보여주는 대표 건축물이다. 

7층을 넘어가지 않는 단층 건물들로 구성된 파리 시내에서 54m의 높이는 가히 랜드마크라 불릴만하다. 이는 개선문 보다도 높고 파리 중심지 어디서도 만날 수 있는 전통적인 마천루인 셈. 탑 꼭대기는 상설 개방하지 않고 가이드 투어 동반한 프로그램 이용 조건으로 생 자끄 공식 사이트에서 예약하면 입장 가능하다. 또한 매년 가을 하루 동안 열리는 문화유산의 날 journee patrimoine 에는 무료 개장한다고 하니 꼭 한번 시도해보고 싶다.

파리의 가장 오래된 길 중 하나인 롬바르드 길은 중세 초기 때는 와인 시장이 성업하던 상업 골목이었다. 1300년 경 현 토스카나 지역의 시에나 출신 톨로 메이 가문이 중심이 된 이태리 상인들의 이주. 그들이 고리대금업을 시작하며 현재의 월스트리트와 비교할 만한 파리 금융의 중심이 되어, 시에나의 기원 롬바르드 족에서 따온 « 롬바르드 길 »로 이름 지어졌다. 성황 한 자본의 흔적은 골목 이름으로 밖에 남지 않았지만 지금은 재즈바 밀집지역으로 활기를 잃지 않고 있다. (비록 우리는 이른 오전에 산책하여 그 활기를 느낄 수 없지만...)


샤틀레 레알 광장 한가운데 위치해 오며 가며 자주 봤던 '이노센트 분수대 Fontaine des Innocents'. 추위에 집중하지 못해 여러 설명은 기억나지 않지만 카타콤브 생성 전까지 한때는 2만 구의 시신을 안치한 공동묘지였다는 사실만 강렬해서 계속 머릿속에 남는다. 


그룹 산책을 마치고 홀로 산책을 더 즐겼는데, 노트르담 재건을 위해 설치된 임시 철근 통로는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파리 시내에서 쉽게 보기 힘든 거대한 기중기 두대와 함께 설치미술 같기도 하고... 산책 처음에 만난 생 자끄 타워 일부 장식 복원도 4년이나 걸려 스퀘어를 폐쇄했었는데, 노트르담 재건 일정은 예상조차도 할 수 없다. 


맞은편 작은 공원에 크리스마스 마켓 Marché de Noël 이 열렸다고 해서 구경했다. 내부는 영상으로 후욱 한번 찍어두었다. 딱히 볼 건 없었지만, 연휴기간에 시댁에 갈 때 가져갈 향 좋은 수제 비누 몇 개를 구입했다.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나와 역시 오래된 길 중 하나인 생 줄리앙 르 포브르 길 Rue Saint-Julien le Pauvre을 끼고 걸었다. 아침 내 추위에 떨어 근처 아무 베트남 식당 검색해서 뜨끈한 쌀국수나 먹을까 싶었는데, 12시 전이라 문을 연 곳이 없었다. 식사 시간까지 몇 분 남지 않았지만 오랜 시간밖에 있던 터라 추위가 밀려와 어디든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우연히 Salon de thé 입간판을 보고 생각 없이 이곳에 들어왔다. 암만 식사시간 전이였지만 이 엄청난 관광지구에 손님은 나뿐이었다. 따뜻한 라테 한잔만 시키고자 마음먹고 메뉴판을 접었는데 서빙을 겸하는 주인장이 식사도 할 거냐고 물어 홀린 듯 에그 베네딕트도 시켰다. 그가 장사를 잘하는 건지 아님 날이 추워 장소 이동이 귀찮았던 건지... 중세 고딕 스타일의 건물 외형처럼 내부도 옛 모습에서 크게 변한 것 없이 유지한 듯 데코 했다. 하지만 그 앤틱 한 그 분위기가 뭔가 더 언발란스해 보였다. 중세 프랑스 건물의 역사적인 찻집 주인장은 아랍계, 주방에서 일하는 그의 파트너는 중국계였다. 거기서 홀로 음악도 나오지 않는 고요한 식사를 - 그것도 국적 모를 에그 베네딕트를 먹고 있는- 하는 나까지 묘한 세계의 충돌 같은 느낌이라 머무르는 내내 괜히 웃겼다.    

파리 시청 앞은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전통적으로(?) 야외 스케이트장을 설치하곤 했는데 올해는 간단한 크리스마스 마켓과 장식만으로 비교적 소박한 분위기였다. 조금 어둑해지자 화려한 조명들이 잔뜩 켜지긴 해도 예년과는 다른 느낌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샤틀레 캐노피 센터에도 크리스마스트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넷플릭스 자본으로 만든 거대한 광고 트리. 사면 각각 다른 테마로 포토 스폿까지 만들어 광고 효과는 대단할 것 같다. 


낮 동안 보아온 연말 장식들과는 비교할 수 조차 없지만 우리 집도 크리스마스트리를 개시했다. 아파트 지하 창고에서 끄집고 올라온 귀찮음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투지였다. 이 집에서 보낸 4번의 겨울 동안 (번아웃에 절던 재작년을 제외하고) 3년을 본 같은 장식이라 지겨울 법도 하지만 매번 봐도 이쁘다. 별 비싼 것들도 아니었는데 오너먼트 하나하나 다 내 맘에 든다. 오래오래 두고 써야지. 또 이렇게 한해와 작별을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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