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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돌이가 지나간 폐허의 한복판에서

[특집 '586' 닫는 글] 편집위원 열음

무너진 바벨탑의 잔해만이 남은 이 세계에서는 언어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아우성이 들리는 듯하다. 언제 같은 언어를 썼었냐는 듯 웅웅 울리며 서로를 할퀴는 말들 사이로 확실하게 전달되는 것은 다만 서로를 겨눈 몰이해와 체념, 포기 따위의 비관뿐.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이 땅 위에는 여전히 70억 개의 언어가 흩어져있으며 당신과 나는 결코 같을 수 없는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서로가 같은 언어로 말을 한다는 굳건한 맹신 속에서 곧잘 이해와 타성을 혼동한다.


솔직해지자. 당신과 나는 단 한 번도 같은 언어의 발화자였던 적이 없었으며,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는 당신이 완성한 진보를, 맹목적인 지지를, 오랜 날의 영광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며 당신 역시 내가 건설할 청년기에, 비전에, 사람답게 살고 싶다며 외치는 세상에 공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 당신과 나는 서로의 가장 열렬한 청자는 될 수 있을 것도 같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 창세기 11장 7, 8절


그 옛날 바빌로니아의 사람들이 오직 창공에 닿고자 하는 일념으로 바벨탑을 쌓았듯, 당신과 나의 언어는 완벽히 서술해낼 수는 없지만 각자가 옳다고 믿는, 어떠한 막연함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되뇌다가 시간의 흐름 속 길을 잃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선 글들로부터 단절된 시대가 쌓아낸 언어의 이면에는 결국 바래지 않는 각자의 신념이 자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아직은 위선으로만 느껴지는 당신의 언어가 발화될 때, 당신이 당신의 언어로써 내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일렁이는 촛불 너머로 비친 당신의 눈동자는 현재가 아닌 과거를 조망하기에 나는 자주 당신의 텅 비어버린 시선을 마주하지만, 동시에 그 눈짓으로부터 여전한 단단함을 읽어낼 수 있다. 이미 식어버린 라떼 한 잔으로 치부하기에는 지금의 사회가 당신에게 상당한 빚을 지고 있음을, 당신이 내게 건네는 언어에는 단순한 참견 이상의 어떠한 염원이 녹아 있음을 나는 안다. 당신이 고집스럽게도 들고 있는 촛불과 우리의 안에서 숨을 죽인 불꽃이 어느 소실점에서 만나 마침내 타오를 수 있다는 믿음은 나의 순진한 낙관일 뿐일까. 만약 당신과 나를 이루는 언어 속 스민, 그 막연한 염원이 어디에선가 만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염원을 매개로 비로소 소통할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이제 묘하게 틀어진 우리의 언어가 엄벌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또 한 번 낙관하겠다. 무너진 바벨탑과 함께 흩어져버린 각자의 언어는 우리를 불통하도록 했지만, 또한 서로가 내뱉는 소리에 귀기울일 수 있도록 했으며, 무엇보다 세계를 수억 가지의 시선으로 형용하게끔 했으니 말이다. 


부디 이 글을 마주할 당신이 우리가 지새운 무수한 새벽을 이십 대들의 치기 혹은 무모함으로 치부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이미 겪어보았다는 자만보다는 존중이, 지난한 영웅담이라는 무시보다는 존경이 필요할 테다. 서로의 언어를 경청할 준비가 되었을 때, 마침내 나는 당신의, 당신은 나의 극진한 청자가 될 수 있다. 당신과 나는 앞으로도 숱한 소용돌이를 빚어내게 될 테지만, 그렇기에 우리가 발 디딘 이곳은 언제든 무너질 수도 있겠지만, 폐허가 된 이후에야 다시 세워질 것들이 실재함을 믿는다. 당신과 나 사이 자리하던 새삼스러운 침묵을 넘어 현재가 재건될 그즈음, 퇴색되었다고 치부했던 당신의 지난날은 어느새 나에게로 이어져 새 시대를 이룩하고, 어긋났다고 믿어 온 당신의 시간은 어쩌면 내가 그려낼 세상에서 다시금 흐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 순간 우리의 언어 역시 길었던 시간의 간극과 무수한 오해를 넘어, 비로소 맞닿을 수 있기를.



편집위원 열음 / yeoleums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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