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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그 돈으로 미국대학 학위를 딴다고?

삽질이 이끈 유학길

어릴 적, 88 서울올림픽을 기념으로 세계여행 만화책이 흥행하던 때, <달려라 호돌이>라는 만화책으로 세계여행을 돌고 돌았다. 무엇에 이끌려 나는 홀린 듯, 언젠가 나도 해외를 누비고 다니리라 상상하며, 팝송을 음만 따다 써서 엇비슷한 발음인가 연습하고 녹음하며 부르고 다니곤 했다. 그때 가장 사랑하던 노래가 마이클잭슨의 <Heal the world>이다.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에 나오는 쥴리아로버츠 분의 연기를 맛깔나게 따라 하며 대사를 외우고 다니던 대학 시절, 호주로 학자금 대출받아 '해외 세 달 살기'를 하며, 영어는 나의 숨 쉴 곳, 탈출구였다. 호주를 가기 한 해 전 즈음, 나는 교통사고로 내 막냇동생을 잃었다. IMF로 집안이 기울어 집을 옮기고 옮겨 아주 낡은 작은 아파트로 월세살이를 시작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남동생이 떠나고, 교통사고를 낸 버스공제조합으로부터 얻은 보험금으로  남은 네 식구는 그나마 살만한, 그렇지만 크지 않은 아파트로 집을 옮겼다. 그런 집에서 해외란, 꿈도 꾸지 못할 형편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래도 어릴 적 꿈은 가슴에 묻은 채, 대학에 입학한 후 단 한 번도 영어공부는 쉬지 않았다. 대구 시내 어학원에 대학 1학년때부터 등록하여 매일 왕복 2시간여를 다니며 회화, 스크린영어, 토익 안 배워 본 영어가 없었다. 당시에 그 어학원에 붙은 게시글 하나를 발견했다.


'무료 해외어학연수'!


그것으로 나는 해외에 처음으로 가게 되었다. 그 길로, 나는 영어를 공부한 무엇인가를 연습해 볼 기회가 주어졌다. 나름은 알아듣고, 몇 마디라도 해 볼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부족했다. 그래서, 다음 해에 아버지의 땡빚을 내어 뉴질랜드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뉴질랜드에서는 현지 어학원 GEOS라는 곳에 등록하여, 6개월 동안 회화는 advance클래스까지 다녔고, TOEFL (영어권나라 주로 미국에서 외국인들이 학사 또는 석사 이상을 공부하기 위한 영어 자격증 시험) 공부를 했다.


뉴질랜드에서 돌아와서는 대학을 졸업하고, 영어강사로 대구 달서구의 어학원에 취업하여 초, 중등 학생을 가르쳤다. 당시의 영어교습 방법이 내가 공부하던 어학과는 동떨어진, 단순히 학교시험을 위한 문법 수업이 거의 전부였다. 초등학생들은 문장을 듣고 달달 외우는 pattern drill과 screen English라는 이름으로 단순화한 대사를 외우게 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내가 공부한 영어공부로 더 세계와 가깝게 좀 더 효율적인 영어를 가르치는 TESOL(Teaching English for Speaking Other Languages) 자격증 공부를 하기 위해, 서울 SMU TESOL과정을 수강하게 되었다.


계획이라는 것도 없이, 어느 날 노트북 인터넷 검색창을 휙휙 넘기며 보다 만난 어느 광고글 하나에 홀려 나는 서울로 짐을 싸게 되었다. 그리고, 1학기 동안 숙명여대 앞의 숙대원룸 4평 남짓한 작은 방에 화장실과 부엌, 그리고 창이 아주 조그맣게 달린 곳에서 그야말로 치열하게 서울살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서울살이를 하러 가던 날.


마지막 TOEIC을 치러 가다 눈길에 미끄러져 교통사고로 내 차는 1/3은 고쳐야 했고, 나는 목과 등줄기를 따라 거의 마비가 올 만큼 크게 다쳤었다. 가족에게는 비밀로 한 채, 나는 서울로 올라가 숙대원룸에서 첫날을 보내게 되었다. 커다란 이민가방(트렁크로 된 짐 가방으로 몇 단을 풀어, 주로 해외살이를 하러 갈 때 쓰는 가방)을 끌고, 지하철의 그 많은 계단을 오르내리며 겨우 도착한 청파동 숙명여대로 가는 오르막길의 어느 비탈길의 원룸건물.


그렇게 나는 그해 겨울부터 봄을 지나, 여름까지 정말 열심히 공부했고, 우등상을 타고 SMU-TESOL과정을 졸업했다.


숙대원룸의 방값이 당시, 2005년. 보증금 2천만 원에 월 20만 원이었다. 다음 계획이 없었던 나는 그 2천만 원으로 무엇을 해 볼까 생각하던 중, 숙명여대 한 교수님께서 좋은 성적으로 미국 대학 석사과정에 진학해 보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TOEFL 학원을 등록하고, 그곳에서 3개월 정도 수강했던 것 같다. TOEFL 은 당시 CBT였고, 300점 만점에 273점을 받아, 나는 미국의 12곳 주립대의 영어교육과를 지원하였고, 11곳에서 합격통지서를 받게 되었다.


그중에, 시골 출신답게 아는 곳이 New York밖에 없었기도 하였거니와 2년 안에 2천만 원으로 학위과정을 마칠 수 있는 학교가 기준이었기에 더 높은 순위의 인지도가 있는 굿모닝팝스 오성식 님의  모교인 MSU(Michigan State University)를 뒤로 하고, The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at Buffalo에 가게 되었다.


학비와 모든 수수료가 한 학기에 500만 원. 4학기에 끝낼 수 있는 딱 내가 가진 보증금 2천만 원으로 갈 수 있는 학교. 나에게 최적의 학교였다.


나는 그곳에서 1년 반, 3학기 만에 조기졸업했다. 1학기는 숙대에서 받은 학점을 인정받았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졸업고사를 한 번에 패스하며 석사학위를 계획한 대로 제때에 받을 수 있었다.


국내의 수많은 대학이 당시에 서울기준, 체류비까지 한 학기에 500만 원으로는 어림도 없었기에 작은 도시였던 버펄로의 집값 2명이 셰어 하는 데 보증금 없이 28만 원으로 충분하였던 것까지 흙수저인 나에게 아주 적합한 기회였다.


누구나 꿈이 있다면, 도전하라!


계획도 없고, 당장은 깜깜하더라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나도 그 깜깜하던 암흑 속, 내가 언제 어느 때에 쓰게 될지 모를 내 앞에 놓인 것에 최선을 다 했을 뿐인 것을.


나에게도 기회는 왔고, 그렇게 이룰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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