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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하마 Dec 01. 2023

나 자신 속의 괴물을 만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을 보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풀밭을 홀로 걷는 아이, 그리고 사이렌 소리와 내면서 소방차들이 달려가고, 베란다에서 불길에 휩싸인 건물을 바라보며 싱글맘 사오리(안도 사쿠라)가 외치는 오프닝 씬에 신경의 촉수가 일시에 곤두섰습니다.

  “힘내라!” “파이팅!”

  소방관을 향한 응원이 아니라 오히려 불길에게 보내는 외침 같았고, 자신에게 외친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아무래도 스크린에 푹 빠져서 헤어나기 힘들겠다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마나토(쿠로카와 소야)는 엄마 사오리한테 어떤 감정도 묻어나지 평범한 목소리로 묻습니다.   

  “돼지 뇌를 이식한 인간은 돼지일까? 인간일까?”

  반복적으로 나오는 이 대사는 영화적 메시지를 푸는 화두가 됩니다. 이어서 마나토의 기이한 행동이 시작되죠. 호리(나가야마 에이타) 선생님한테 맞아 귀에서 피가 흐른 채 돌아온 걸 본 사오리는 이를 항의하기 위해 학교를 찾아가지만 비상식적으로 대응하는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교사들의 태도에서 인간과 괴물의 만남을 보게 됩니다.  


  관객들은 이때부터 괴물의 존재가 누구인지에 초점을 맞춰 스토리에 몰입되기 시작합니다. 스토리는 구로자와 아키라의 <나생문>처럼 하나의 사건을 각기 다른 인물의 시점에 따라 다르게 진행되듯이 사오리와 호리, 그리고 마나토와 요리(히이라기 히나타)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고, 그에 따라 관객의 의식과 판단도 요동치게 되죠. 거기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메멘토>처럼 현실과 과거가 교차되면서 서사가 진행되죠. 인물에 따른 시점의 변화만이 아니라 역순행적인 씬을 통해 앞에서 보여줬던 사건의 동기를 명확하게 해명해 줌으로써 요동치게 만들었던 관객의 판단과 의식은 새롭게 교정되고 정리됩니다.    

  마나토와 요리가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어른들의 편견과 차별, 그리고 왕따를 시키는 아이들의 폭력적 행동이 괴물의 면모를 여지없이 드러내지만 가슴을 먹먹했던 건 애초부터 괴물은 없었다는 점입니다. 괴물을 찾으려고 집착했고, 집착이 따르다 보니 괴물을 만나게 된 거죠. 괴물에 대한 논리적 정당성을 부여할수록 괴물은 더 확고해졌고요. 그러니까 스스로가 괴물을 찾으려다 괴물이 돼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거죠. 그래서 부끄럽고, 눈물이 찔끔 났습니다.



  <괴물>의 인상적인 장면을 정리해 봅니다.

   첫째, 인물의 섬세한 심리와 치밀한 구성으로 마치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인물 간의 관계를 조밀하게 결어 내는 능력에 할 말을 잃었습니다. 거기다 사물과 행동, 대사 한마디는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그 의미가 확연해집니다. 칸느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은 건 다 이유가 있습니다.

  둘째, 근거도 없이 사람을 괴물로 전락시키는 건 편견이고, 몰이해입니다.  호리 선생님은 불이 난 걸스바에 다닌다는 소문에 시달리고, 그의 어머니가 싱글맘이었다는 것으로 그의 됨됨을 규정해 버리죠. 초등학교의 교장 후시미(타나카 유코)도 소문에 시달리는 인물이죠. 그의 남편이 운전미숙으로 손녀딸을 죽였는데 사실은 후시미가 그것을 바꿔치기했다는 소문입니다. 해명해도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을 터이니 폭탄처럼 아픔을 끌어안고 살아갈 수밖에. 근거 없는 소문은 사람을 두 번 죽이는 일입니다.



  셋째, 아이들의 거짓말은 어른들에게 끔찍한 재앙을 가져옵니다. 물론 아이들이 거짓말을 하게 만드는 상황으로 몰아가는 어른들의 잘못이 더 크긴 하지만. 호리 선생님이 아이들의 사소한 거짓말로 겪는 아픔은 죽음 이상으로 치명적입니다. 어린 소녀의 맹목적인 거짓으로 인해 마을사람들로부터 매도당하고, 거의 파멸에 가까운 고통을 겪는 매즈 니켈슨의 <더 헌트>가 떠올랐습니다.  

  넷째, 가정방문을 한 호리 선생님한테 보자마자 요리의 아버지 키요타카(나카무라 시도)가 묻는 질문은 거의 폭력이었습니다. 우리한테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죠.

  “당신, 어느 대학 나왔어?”

  “교사는 봉급도 적잖아.”

  “난 메가시티에 근무했던 사람이야.”

  자기 과시와 알코올 중독자인 독선적인 아버지의 밑에서 자라는 요리가 상처를 받고, 학교에서 아웃사이더가 되는 건 당연합니다. 그가 혼란스러워하는  성적인 정체성도 어른들의 시선으로 규정된 것이죠.  



  다섯째, 동네사람들에게 손녀딸의 사고사에 대해서 설명해 봤자 설득도 되지 않을 게 뻔해 가슴속에 묻고 아픔을 견뎌내는 후시미 교장선생님과 엄마한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마나토가 교실의 난간에서 만나 마음을 나누는 건 한줄기의 희망이었습니다. 물컵을 약간 기울어지게 들고 마나토가 혼잣소리로 말하죠.

  “죄송합니다.”

  거짓말을 했던 호리 선생님에 대한 마음이었죠. 옆에서 그 말을 들은 후시미 교장선생님도 자신도 그렇다고 고백을 하죠. 학교의 이미지 타락을 막고, 조직을 지키기 위해 호리선생님에게 잘못을 시인하라고 억지로 강요했던 것에 대한 반성이었던 셈이죠. 뒤에 이어지는 후시미 교장선생님 대사는 영화의 핵심적 메시지이기도 하죠.

  “몇몇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건 행복이 아냐. 누구나 다 가질 수 있어야만 그게 행복이지.”

  그리고 음악실에서 마나토는 트롬본을, 후시미 교장선생님은 호른을 들고 불기 시작하죠.

  “세상에 말할 수 없을 땐 이걸 입에 대고 불어.”

  교장선생님이 악기를 보는 건 말로 하지 못하는 답답함을 풀어내는 해방구이자 구원이었던 셈입니다. 음악이 소리의 조합으로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어울려 조화를 이루는 일, 그거야말로 우리가 꿈꾸고, 지향하는 세상이 아닐까요.

  아직은 그런 세상이 아니죠. 그렇기에 사람들로부터 상처받은 마나토와 요리가 억압과 굴레에서 벗어나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한 건 산속에 버려진 객차의 공간이었습니다. 그들이 만든 세계를 어른들이 이해하고, 보호해 줄 때 함께 사는 세상이 되겠죠. 엄마 사오리와 호리 선생님이 마나토와 요리의 관계를 이해하고, 객차로 찾아갔을 때 마나토와 요리는 굴레와 구속에서 벗어나 해방이 됩니다. 햇빛이 환하게 쏟아지고, 푸른 나무들이 어우러진 숲으로 웃음을 가득 지으며 달려가는 마나토와 요리. 어쩌면 현실 세계가 아닌 판타지처럼 보였는데 그게 죽음 이후의 세계가 아닌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세상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습니다.


 ※ 영화를 보는 내내 괴물의 존재를 찾으려다 내 자신 속에 있는 괴물과 조우한 아이러니는 논리보다 감성에 의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감성을 가능하게 한 것 중 하나가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악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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