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주>는 실패할 자유를 향한 절규이자 몸부림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자유의 범주 자체가 구체적이고, 비관적입니다. 무제한의 자유라는 건 무개체적이라 실감하기 어렵지만 실패할 자유는 어딘가 나 자신과 관련되어 있는 일상적인 느낌이 들고, 그래서 흡인력을 더 갖게 되죠. 더구나 실패라는 각도에 맞춰 인생을 거는 사람은 미래를 회의적으로 전망하는 법이기에 실패할 자유는 역설적으로 실패할 현실에 대한 면역성을 높여줘 실패하더라도 다시 시도하는 에너지와 탄성을 얻게 됩니다. <탈주>의 방점을 자유보다 실패에 찍는 건 그런 이유에서라고 봅니다. 인간에게, 특히 젊은이에게 실패보다 위대한 경험은 없습니다. 다만 가짜로 실패하고, 실패하는 포즈를 취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실패할 자유를 향해 질주하는 규남(이제훈)의 행동은 행복에 대한 갈망입니다. 환경결정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I will my way에 대한 의지는 전투적인 실존적인 삶이고, 아메바 같은 삶을 온몸으로 부정하는 거죠. 남조선이라고 다 낙원인 줄 아느냐라고 일갈하는 현상(구교환)에게 대꾸하는 규남.
“실패는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실패할 수 있는 삶, 멋있지 않습니까!”
실패할 자유야말로 인간을 구원하는 길이고, 인류의 문명을 일궈온 초석이었던 셈이죠. 하지만 <탈주>가 다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난 뒤에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건 주인공 규남보다 악인 캐릭터였던 현상이었습니다.
왜 현상이라는 인물이 그렇게 강한 인상을 남겼을까요?
현상이라는 인물에 대해 몇 가지 느낀 점을 정리해 봅니다.
첫째, 악인들은 악인들만의 서사가 있습니다. 만약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빈 미술학교에서 두 번씩 입학거부를 당하지 않고 정식과정을 통해 화가가 됐더라면 인류의 역사는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림에 대한 열정이 꺾이자 그 열정이 파괴에 대한 광기로 폭발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죠. 현상도 서글픈 과거 서사가 가슴속에 겹겹이 쌓여있는 인물이죠. 러시아 유학시절에 꿈꿨던 피아니스트에 대한 열망, 우민(송강)과 이루지 못한 사랑이 좌절된 현실에서 낭만적인 감성은 탐미적인 광기의 파괴 욕망으로 분출됩니다. 탈주하려는 규남을 악착같이 잡으려는 건 정치적인 출세욕이라기보다 규남을 통해 보이는 자신의 과거 그림자에 대한 열등감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미 오래전 열망이 꺾인 자를 가장 아프게 하는 건 그런 열망을 아직도 싱싱하게 품고 있는 자가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라고 하고 싶은 게 없었갔어? 기냥 사는 기야 기냥!”
파티 석상에서 현상에게 피아노를 연주해 달라는 부탁을 몇 번이고 거절하다가 결국 그가 연주한 곡은 라흐마니노프 <Prelude G Minor Op. 23 No 5>였죠. 이 피아노 연주곡은 라흐마니노프가 예술가로서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의 갈등과 고뇌를 담아낸 것으로 알려 있습니다. 현상이 피아노 건반을 치던 표정과 눈빛도 희열이 아니라 체념과 우울의 감성이었고, 다시는 이룰 수 없는 부서진 꿈의 잔해를 터치하는 연주였죠. 특히 규남을 잡지 못하자 현상이 그의 부하를 두들겨 패는 모습은 거의 광기의 폭발에 가까웠죠. 폭력도 예술이 되고, 종교까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폭력을 휘두르는 순간에 나온 OST도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이었죠. 라흐마니노프가 초연의 실패 때문에 슬럼프에 빠져있고, 설상가상으로 나탈리아 사티아와의 이별로 암흑의 시간을 보내던 중 작곡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열망은 라흐마니노프였는데 현실은 보위부 소좌였으니 규남이 없었더라도 그는 자신을 스스로 파멸시켰을지도. 그는 충분히 그럴만한 지적인 감성이 있으니까요.
둘째, 악인이 이렇게 감성적으로 세련되고 광기의 폭력성을 드러낼 수 있을까요? 드라마나 영화에서 악인은 주인공과 극적 균형을 맞춰 긴장감을 조성하거나 혹은 주인공을 드러내기 위한 역할로 등장하기 마련이죠. 그렇게 때문에 악인의 등장과 소멸은 스테레오 타입이 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현상은 규남과 극적인 균형을 이루어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역할을 뛰어넘어 악인의 빛을 내는 매력적인 캐릭터로 기억됩니다. 매력적인 캐릭터가 되는 건 부드러움과 냉소, 따뜻한 포용과 공포감을 느끼게 하는 반전, 비어있는 여유의 웃음과 칼날 같이 섬뜩한 눈빛이 장면마다 교차하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입체적인 악인의 모습을 저릿하도록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셋째, 악인의 집요함과 함께 동시에 유머 감각도 탁월하게 보여줍니다. 군대를 총동원해서 규남을 추격할 때, 치밀하게 무전기로 명령을 내리죠. 마치 일본 센고쿠 시대 다이묘의 전투와 삼국지의 전투 장면을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그의 명령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씬은 마치 게임 같기도 했죠. 거기다 규남을 발견하자 사격명령을 내리고, 규남은 병사들의 십자포화의 타깃이 되어 엄청난 총탄사례를 받는 씬이 있습니다. 엄청나게 쏟아붓는 화력. 그리고 스피커가 터질 듯한 총성. 그 순간 차 안에서 웅크리고 앉아있던 현상의 한마디. 아주 부드럽게 신경질적으로 툭 내뱉습니다.
“아, 시끄러.”
넷째, <파우스트>에서 파우스트를 타락시킨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검은 망토를 걸치고 등장합니다. 파우스트를 타락시킨 건 메피스토펠레스였지만 애초부터 파우스트 마음속에는 악마와 파괴의 욕망이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메피스토펠레스가 걸치고 다니던 검은 망토는 파우스트가 가지고 있었던 욕망의 그림자였던 셈이죠. 규남의 열망은 현상의 열망과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규남은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상태이고, 현상은 유효기간이 다 지난 티켓처럼 박제된 열망으로 남아 있을 뿐이죠. 끝내 현상이 규남에게 겨누던 총의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 건 자신의 박제된 열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 잘 가라. 이제는 내 것이 아닌 열망이여.
사족 – 달리고 또 달리는 스피드도 좋지만 좀 더 개연성 있는 구성과 스토리였더라면 완성도도 훨씬 높아졌을 텐데. 구교환을 보는 즐거움으로 그게 상쇄되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