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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수의사 Aug 25. 2023

걸음이 느린 아이

보호자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그날은, 해 질 녘 초 여름의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산책하기 딱 좋은 날이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숲길에 발을 들였을 때 이미 많은 사람들과 강아지들이 있었다.

  짧다막한 꼬리를 바짝 세우고 보호자와 함께 종종걸음을 걷는 하얀 비숑프리제 Bichon Frise,

  혀를 내민 채 숨을 헐떡이면서도 신이 나 열심히 킁킁대며 걷는 프렌치불독 French Bulldog,

  마치 자신이 예쁘다는 것을 아는 듯이 우아한 자태로 도도한 걸음을 걷는 포메라니안 Pomeranian까지.

  강아지와 함께 하는 발걸음에, 보호자들의 얼굴에도 상쾌함이 엿보였다.

  반려동물과 보호자가 만드는 한가함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출처 : job562-nunoon-05-g:Freepik.com  


  그런데 그중 유독 힘들어하는 강아지가 눈에 들어왔다. 물론 그 옆에 있던 지친 얼굴의 보호자와 함께.

  절뚝. 절뚝.

  왕년엔 커다란 몸집으로 에너지를 발산하고, 신나게 뛰어다녔을 법한 강아지가 지금은 등뼈가 드러나는 깡마른 몸에 앞발과 뒷발을 절룩거리며 힘겹게 한걸음 한걸음 내딛고 있었다.

  아-주 느린 걸음으로 보호자의 옆을 걷다가 서다가를 반복했다. 보호자는 몇 걸음 못 가 아이의 엉덩이를 받쳐주며 잠시 휴식을 주었다.

  절뚝. 절뚝. 휴-

출처 : labrador-380800_1280:Freepik.com


  벤치에 앉은 채 한참 동안 그 아이에게 시선이 머물렀다. 사실 한참의 시선이 머무를 수밖에 없는 느린 속도의 걸음이었다. 앞발목이 많이 두꺼워져 있었고 뒷다리도 상당히 뻣뻣한 걸음이었기에 그 아이를 괴롭히고 있는 통증이 나에게도 느껴지는 듯했다. 게다가 몇 걸음 못 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엉덩이를 받쳐주는 보호자의 모습에서 강한 연민이 느껴졌다. 


  밖에 나와서는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잘 걸지 못하는 성격이기에 그 아이와 보호자의 힘든 모습을 보며 순간 심각한 내적갈등이 있었지만 잠시 후 나도 모르게 보호자에게 말을 걸었다.


  "아이는 다리가 좀 불편한가 봐요. “

  보호자는 자주 듣는 이야기라는 듯이 빠르게 답했다.

  “. 많이 불편해요. 나이도 많고요.  안에서는 배변을 절대 하지 않는 데다가 산책을 워낙 좋아해서 하루에  번씩 데리고 나와요.”

  불편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거리낌 없이 대답해 주시는 모습이 오히려 이 아이에 대한 거침없는 애정이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평소 정체를 숨기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던 나였지만, 먼저 내 직업이 수의사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보호자는 마치 그간 쌓여있던 응어리를 풀어내듯 그동안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지금 열다섯 살이에요. 아홉 살 때부터 다리를 불편해했고 병원에서 '고관절이형성증' 진단을 받았어요. 지금은 고관절이 대부분 녹았고 언젠가부터 앞발도 불편해했는데 부어있는 상태가 꽤 오래 지속되고 있어요. 약을 계속 먹고 있는데 이젠 약을 먹어도 나아지는 것 같지가 않아요. 검진은 정기적으로 받는데, 최근 검진에서도 다리 아픈 거 빼고는 나이에 비해 다 건강한 편이라고 들었어요."

  

  이외에도 이 아이의 일대기에 대해 꽤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보통 노령의 환자가 초진으로 오면 일반적으로 갖게 되는 시간이다. 점심시간 십분 전, 점심메뉴를 정해놓고 기대감에 차있다가 이와 같은 환자의 진료를 보게 되면 동료들에게 먼저들 가시라고 슬픈 눈의 사인을 보내곤 했었다. 하지만 대부분 생사를 넘나드는 극적인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다시금 집중하게 된다. 함께한 시간이 얼마인데 하고 싶은 이야기가 얼마나 많겠는가. 사실 대부분의 보호자는 매우 함축적으로 전달하려 노력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분 역시 그랬으며 대화를 통해 '이 보호자께서는 이 아이를 케어하면서 정말 많은 공부를 하셨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보호자의 학구열과 아이를 잘 케어하려는 노력에 비해 현재 아이의 다리가 너무 아파 보였기 때문에 실례일 줄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에 지금까지 받았던 검사와 치료에 대해 여쭤보았다. 내가 직접 검사한 것이 아니고 보호자의 이야기만 들은 것이기 때문에 섣불리 판단하면 안 되지만 나로서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다.

출처 : Designed by pch.vector / Freepik


  '이 시기에 이런 검사를 했다면 어땠을까. 지금도 먹는다는 그다지 효과가 없어 보이는 약을 이렇게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먹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일반적인 검진을 했다지만 정말 다른 장기에 이상이 생기고 있진 않을까.'


  사람처럼 동물들도 다니던 병원의 치료 효과가 그다지 좋지 못하다고 느끼면 병원을 옮기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경우 가끔은 이전 병원에서의 진단이나 치료가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내 생각 그대로 말씀드리지는 않는다. 내 생각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고, 이전 병원에서 문제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걸 있는 그대로 말씀드릴 경우 보호자들 중 대다수가 분노와 자책감을 가장 많이 느끼기 때문이다. 보호자의 불안정은 환자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찌 되었건 지금부터 잘 치료하여 아이의 고통을 덜어주고 치료가 잘 될 수 있게 집중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본다.


  이런 환자가 왔을 경우 외과적 수술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수의사도 있고 건강상태와 나이를 고려하여 내과적 관리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수의사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보호자께서는 이제 와서 수술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고 했으며 이는 나도 동의한다. 수술을 할 것이었으면 6년 전에 했었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하는 부분은 '통증 경감'이며 이를 위해서는 단순히 약만 먹는 것이 아니라 레이저 물리치료나 관절 주사와 같은 보조적 치료들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추천했다. 우리 병원은 거리가 너무 멀어서 오시기가 힘들다 하여 주변 병원들 중 이런 치료를 할 수 있는 곳을 꼭 문의하시고 내원하시라 했다.

출처 : labrador-retriever:Freepik.com  


  그러자 덩치 큰 귀여운 아이는 마치 내 말을 잘 들었다는 듯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얼굴을 슥슥 비볐다. 아픈 다리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가까이 와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아서 마음이 뭉클했다. 


  보호자께서도 오늘 이렇게 우연히 산책 중에 만나서 이야기하게 되었지만 우리 덩치에게 더 해줄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며 인사를 하시곤 또다시 공원길을 따라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걷고 엉덩이를 받쳐주기를 계속하셨다. 그 뒷모습에서 보호자님만은 아까 전에 비해 한 결 가벼워진 발걸음처럼 느껴졌다. 다음에 만나게 될 때에는 이 큰 친구의 발걸음도 더욱 가벼워져 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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