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으로 기억하는 그날.
이제 막 출시됐다며 한국에서 날 만나러 온 후배가 아이코스를 사다 줬다.
일반 연초형 담배에 비해 덜 해롭고, 냄새가 안 밴다는 등의 장점에 끌리기에 앞서 일단 디자인이 맘에 들었다.
언박싱 순간부터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한 번만 빨아보자며 귀찮게 하는 인간들로 둘러싸인 가운데 유독 거슬리는 한 사람.
여러 카지노를 돌며 약자만을 골라 잔인하게 괴롭히는 악명 높은 뒷전이었다.
반건달 행세하며 나이 들고 힘없는 무고한 앵벌이들을 괴롭히던 힘센 뒷전.
뒷전 VS 앵벌이
어감 차에 따른 계급 구분을 상상할는지 모르지만 스스로가 양심적이라면 앵벌이에 수긍할 것이요 그래도 가급적이면 뒷전으로 불리길 바라는 같은 종, 고개 숙인 호모 빌어먹다쿠스.
모두가 물러간 뒤에도 혼자 남아 집요하게 묻는다.
"이거 얼마야? 핸드폰처럼 충전하는 거야? 어때? 괜찮아?"
"나는 그냥 일반 담배가 더 맞는 거 같에. 방귀냄새 비슷한 이상한 냄새도 나고"
"어! 그래? 그럼 나 줘 흐흐흐"
"열라 뻔뻔하네. 친한 후배가 선배 생각해서 방금 사 온 건데 어떻게 주나? 100페소 줄 테니까 지프니 타고 집에 가!"
한국인에게 100페소는 수치요, 지프니는 필리핀 대중교통수단의 하나로 그것을 타고 가라는 것은 모멸감 선사.
나 보다 대여섯 살 많았던 양반. 그렇게 대해도 일말의 죄책감 느낄 필요 없는 그런 인간이었다.
나이 든 선배들 반말로 대하고 수틀리면 폭력에 돈까지 강탈하는 양아치.
얼마 전, 내가 어떻게든 재기를 돕고자 했던 선량한 사람들에게까지 폭력을 행사한 터라 꼬투리 잡아 복수할 날만을 이 갈며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이 흐르고,
사놓았던 일반 담배가 다 떨어져 어쩔 수 없이 아이코스를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평상시에는 아이코스를 이용했으나 식사 이후 그리고 화장실 갈 때는 일반담배를 피웠다.)
잔뜩 힘줘 묵직한 놈 하나 힘겹게 뽑아내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찰나, 물고 있던 아이코스가 떨어지는데......
하필 다리 사이를 지나 변기로 빠져버렸다.
물을 내리자니 함께 휩쓸려 갈 것 같고, 그냥 두자니 무슨 결말이건 마무리는 지어야 하고.
잠시 주저하다 먼저 몸을 추슬렀다.
집게도 없고, 있던 뚫어뻥도 메이드가 어디로 치웠는지 보이지 않고,
고민 끝에 고무장갑을 끼고, 엄지와 검지를 이용한 비겁한 손 모양으로 아이코스를 집어낸 뒤 물을 내렸다.
'이제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다행히 응집력 높은 응가였기에 흰색 아이코스에 변 스크레치는 없는 상태.
흐르는 물에 외관만 대충 씼었다.
물기가 마르기를 기다린 뒤, 남아있던 고무장갑 한 짝을 끼고 충전해 보니 다행히 맥박은 유지하는 상태.
녀석이 소명을 이어나갈 수 있게 배려하고 싶었다.
긴 숙고 끝에 방법을 내고, 나무 젓가락으로 집어 케이스에 고이 담아 집을 나선다.
사무실 앞에 도착해 뒷전에게 전화해서,
"어디야?"
"나 1층. 왜?"
"올라와 봐"
"아! 참, 귀찮게"
그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 와중에도 환갑 맞은 어른 앵벌이님을 향해 윽박지르는 싸가지.
뭐라 한마디 따끔하게 하려다 거사를 앞둔 시점이라 참았다.
"이거 나한테 안 맞는다. 당신 가져. 후배도 한국 돌아갔으니까 내가 큰맘 먹고 주는 거야."
"오! 역시 X사장 밖에 없어. 고마워!"
좀 전까지만 해도 시건방진 목소리로 통화하던 자가 알랑대는 꼴이라니.
작정한 일이긴 하나, 슬픈 사연의 아이코스를 물고 빠는 키스신만큼은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그를 외면한 채 시선을 돌려 반응을 기다리니 곧,
"오~~~! 오~~~! 좋아~~~!"
그래, 원효대사께서 잠결에 해골물을 들이켜실 당시의 만족감도 그러했으리라.
"근데 이거 약간 물기가 빨리는 거 같은데? 뭐 잘못된 거 아니야?"
순간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긴 세월 수많은 악당들을 상대하며 체화한 임기응변, 임전무퇴 정신이 어디 가랴?
적시에 발현하여 자연스러운 내면 연기를 연출한다.
"어허, 사람을 뭘로 보고. 내 입으로 빨던 걸 어떻게 그냥 주나. 신경 써서 조심스럽게 닦았지. 아직 덜 말랐나 보네."
나 자신이 가증스럽게 여겨질 만치, 즉흥으로 써 내린 시나리오에 맞춰 매끈하게 그려지는 감정선.
"캬아! 역시 X사장!"
아이코스와 함께 변기 물에 몸져누워있던 응가가 떠오르니, 좋다고 빨아대는 모습을 더더욱 보고 싶지 않은 마음. 강한 거부감, 역함.
시간이 흘러 새벽,
잠 깰 겸 운동삼아 걸으며 1층으로 내려가 아는 사람 남아있나 좌우를 살피다 우연히 발견한,
저기 저 멀리 슬롯머신 앞에 앉아 해맑은 미소로 미니멈베팅 하고 있는 그 인간.
드디어 봤다. 못 볼 걸 봤다.
천사의 온화함 가득 머금은 채 아이코스 물고, 빨고, 쓰다듬어 주는 그 인간.
이것은 복수인가 자비인가?
아이코스,
나에게는 똥이요, 그에게는 된장이었고
나에게는 복수였으나, 그에게는 축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