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투 Jul 23. 2021

내 인생 최고의 여행


내가 20대, 배낭여행을 비롯한 해외여행이 자연스레 우리 삶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티브이나 잡지에도 집 팔아 세계일주 한 사람들이나, 온 가족이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온 스토리를 소개하면서 그들이 얼마나 특별하고 자유로운 삶을 사는지 조명했다. 그러면서 여행을 많이 다니는 사람은 뭔가 더 깨어 있고 자유롭고 멋있어 보이는 분위기가 있었다. 나도 갈 수 있을 때 열심히 다녔는데 진정한 여행의 맛을 알았다기보다는 남들에게 있어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실제 내가 멋있는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지금은 여행을 가도 좋고 안 가도 그만인, 그저 자연스러운 일상을 살게 되었지만 그때는 참 전투적으로 여행을 다녔다.


젊어서는 넉넉지 않은 여행경비에 맞추느라 여행 내내 돈 계산을 해야 했고

치안이 안 좋은 곳에 가서는 가방을 앞으로 둘러매고 누가 날 쫒아오나 촉각을 곤두 새웠으며

음식이 안 맞는 곳에서는 여행 내내 더부룩하고 불편한 속을 이끌고

준비해 간 간편식으로 허기를 달래야 했다.

아이가 생기고부터는 제 몸뚱이 하나 제대로 건사 못하는 아이를 챙겨야 하는 행복한 노동이 뒤따랐다.

이런 다양한 이유와 사연에도 불구하고 모든 여행은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나름 재미있고 특별한 경험이 있으며, 역설적이게도 여행을 통해 특별하지 않은 일상의 특별함을 발견하는 눈이 생겼다.

개인적으로 열심을 내기도 했고 감사하게 외국에 살 기회가 있어서 적지 않은 여행을 해보면서 스스로 만족스럽고 선호하는 여행 스타일도 알게 되었다.

여행 다니면서 술자리에서 호기롭게 풀어놓을 만한 특별한 경험을 많이 했는데

정작 다시 가고 싶은 곳은 따로 있다.


나에게 최고의 여행이란 최고의 자연과 마주하는 것.

신이 만든 완벽한 자연과 대면하면서도 너무 오지나 극한 체험은 피하고 싶다.

난 평생을 도시에서만 산 어쩔 수 없는 도시 여자.

그렇다고 너무 현대화된 것도 싫다. 평소와 다를 게 없어 여행하는 기분이 안 난다.

기본적으로 수세식 화장실, 위생적인 식사, 뽀송뽀송한 침구만 보장되면 나머지는 견뎌볼 만하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구현된 곳, 오스트리아 짤쯔감머구트 장크트 길겐 마을.

근처의 할슈타트가 더 유명하지만 난 원래 너무 유명한 곳은 사람이 많아서 살짝 피해 다님.

내가 여행했을 당시만 해도 다른 유럽의 관광지에 비해 한국 사람이 적었는데 요즘은 '꽃보다 할배' 라는 TV프로그램 덕에 더 유명해지고 한국 관광객들이 너무너무 많아진 듯하다.


동화 속 요정이 살 것 같은 집들과 아기자기한 거리, 걷노라면 삶의 이치마저 깨달을 것 같은 호수의 산책로가 무척 투명하고 손대면 깨져 릴 듯 아름다운 곳이다.

오래된 집을 개조해서 만든 호텔과 상점 건물들은 쨍하게 선명한 페인트 칠과 어울리는 원색의 예쁜 꽃들로 정성스럽게 꾸며져 카메라 셔터를 멈출 수없게 만든다.


느지막이 일어나 호수를 바라보며 요정나라 공주님처럼 귀엽게 식사를 마치고

호수를 끼고 마을을 한 바퀴 산책한다.

조식 뷔페에서 챙겨놓은 빵 부스러기를 풀어놓으면 백조랑, 오리가 달려든다.

으악~ 너무 가까이 오진 말아다오 난 너희들을 무서워해!!!


생각보다 날씨가 쌀쌀하네...

그 마을에서만 팔 것 같은 형광 하늘색의 플리스를 하나 사 입는다. 요정이 물건을 팔지는 않았다 ㅋ

아~ 따뜻해!!!

깨끗하고 차가운 날씨에 정신은 맑아지고 플리스 덕에 몸은 따뜻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상태, 최고의 컨디션... 편한 운동화가 걸음을 더 가볍게 해 준다.


호수 근처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냈다면,

다음날도 서두를 것 없이 천천히 일어나 등산아니고 ㅋ 케이블카를 타고 샤프베르크 산에 오른다.

짤츠캄머구트 일대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주위 산들에 폭 둘러싸여 그 어떤 고통과 오염도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 호수와 주위의 자연이 창조주를 생각하게 한다.

여기서 '꽃보다 할배' 누군가가 컵라면을 드셨던 것 같은데... 난 우아하게 커피를 마셨다.ㅋ


돈, 치안, 음식 걱정은 물론 딸린 애도 없이 완벽한 자연과 완벽한 숙소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산책하고, 얘기하고 먹기만 했던 그 모든 시간이 좋았다. 그 시간, 그 장소에 존재했던 나를 다시 느껴본다.


나중에 나이 들어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 곳을 정할 수 있다면 그곳, 길겐 마을에 가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낮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