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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투 Aug 04. 2021

소심한 환경주의자

에어컨이 고장 났다.

올 들어 처음 에어컨을 틀었는데, 찬바람이 나오지 않는다.

이미 몇 주 전부터 본격적으로 에어컨을 틀기 전에 점검을 한 번 해야지 생각했는데, 미루고 미루다 결국 이런 상황을 맞이했다. 요즘은 미룬다기보다 자꾸 잊는다고 해야 더 정확하겠다. 

AS를 신청했지만 이런 극 성수기에 기사님 모시기가 대통령 만나기보다 힘들다.

AS 기사님이 오실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하니 선택의 여지없이 그냥 버텨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안 켰는데 며칠 더 견뎌보자' 마음먹으니 덥긴 하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 집 거실에선 야트막한 산이 보이고 그 뒤로도 탁 트여서 다른 곳보다 바람이 잘 불어 훨씬 시원한 것도 한몫했다. 그러다 참을 수 없는 순간이 왔다.

불 앞에서 밥하다(여름엔 밥하는 게 제일 힘들다) 더워서 냉동실에 얼굴을 들이밀고 열을 식히는데 택배 받고 모아 놓은 아이스팩이 눈에 들어왔다. 

'유레카~'

그걸 수건에 싸서 끌어안고 선풍기를 틀어 놓으니 시원한 걸 넘어서 춥기까지 하다.

지금도 무릎에 수건에 싼 아이스팩이 얹혀 있는데 서늘~하다. 꼭 해보시길^^


이렇게 며칠 지내면서 어쩌면 우린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더운 당연한 자연의 순리를 너무 쉽고 급하게, 내 쾌적함을 위해 거스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름 환경문제에 신경 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더 신경 썼어야 했다.


한 번씩 공포가 엄습하는데 전 세계 지구인이 매일 엄청난 양의 쓰레기와 오수, 매연을 쏟아내는데 지구가 아직까지 버티는 게 신기하다. 

그렇다고 환경문제에 핏대를 올리고 열변을 토할 만큼 아는 게 많지도 않고, 과학적인 데이터를 들이밀지도 못한다. 그저 상식선에서 생각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걸 실천할 뿐.

컵에든 깨끗한 물에 잉크를 한 두 방울 떨어뜨렸을 때야 금세 원래대로 희석되지만 잉크의 양이 많아지면 물이 잉크색으로 변하는 것처럼 지구가 언제 회복 불가능하게 될지 걱정이다.


우리 집은 원래 한여름에도 길어야 열흘 정도밖에 에어컨을 틀지 않는다. 

그 열흘도 하루 종일 틀어 놓지는 않는다.

에어컨 바람도 싫어하고 틀려다가도 실외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길가의 열기가 떠올라 조금 더 견뎌보자 한다.

내가 시원한 만큼 거리는 더 뜨거워지고 있으니...

겨울에도 보일러가 돌아가는 날이 많지 않다. 

해가 잘 드는 이유도 있고 내복과 옷을 따뜻하게 입고 양말과 실내화를 신으면 된다. 

겨울에 보일러를 펑펑 돌려가며 집안에서 반팔을 입고 있는 건 적어도 내가 사는 곳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때는 환경을 생각해 빨랫비누로 머리 감고 식초로 헹구던 시절도 있었지만 머리가 빗자루 털 같아져서 요즘은 값이 조금 비싸도 물을 덜 오염시키는 세제를 선택해 쓰는 것으로 대신한다.

설거지나 샤워 시 물도 최대한 아껴 쓰고 음식물 쓰레기, 분리수거도 꼼꼼히 한다. 

'내가 제일 잘하는 것'이란 글 주제를 봤을 때 가장 먼저 분리수거가 떠올랐다. ㅋㅋㅋ


더운 여름에 서울에라도 가려면 차를 가져가고 싶은 유혹이 많지만 운전도 서툴고 주차도 스트레스고 무엇보다 차가 그렇게 많은 서울에 내차까지 보태고 싶지 않다.

캡슐 커피도 안 마신다. 편리해서 잠깐 머신을 살까도 고민했었지만 캡슐이 재활용이 안 되는 걸 알고 아예 마음을 접었다. 음식을 진창 차려서 먹고 남겨서 버리는 일도 거의 없다. 난 약간 모자란 듯 깨끗이 먹어 치우자 주의인데, 남편은 약간 불만도 있지만 상관없다. 이럴 때 난 독재자가 된다.


미세먼지로 창문을 열 수 없는 날이 많아지면서 집안에 공기청정기와 빨래 건조기가 필수가 되어가지만 

나는 아직 빨래 건조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모두들 건조기를 써보고 극찬하며 사용할 이유를 백가지도 더 대지만 선뜻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그냥 말릴 수 있는데 굳이 전기를 써가며 말리는 것도 싫고, 

여름엔 원래 눅눅하기도 하고 그런 거지 조금의 불편도 참으려 하지 않는 게 안타깝다.

어떻게 완벽하게 자연을 거스르고 살 수 있단 말인가. 

전기를 쓰면 쓸수록 미세먼지는 더 심해질 것이고 우리는 또 공기청정기를 돌려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다.  

언젠가 버티다 못해 건조기를 사는 날이 오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소심하게 건조기 사용을 하루 더 미루는 것뿐이다.


한 번씩 나 혼자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나 싶다가도 나라도 이래야지 생각을 다잡는다.

아니 이 정도의 노력을 하는 사람은 나 말고도 많다. 하지만 더 많아져야 한다.

문명의 이기를 다 거부하고 원시인처럼 살자는 게 아니다, 고된 하루를 보내고 귀가해서 집에서 마저 더위, 추위와 싸우자는 게 아니다. 적어도 쓰기 전에 한번 더 고민하고 어느 정도의 불편함은 감수하자는 것이다. 

전 세계 사람이 한 번씩만 사용을 줄여도, 하루씩만 사용을 미뤄도 지금보다는 나아지지 않을까.


하지만 개인의 노력만으론 한계가 있다. 사람들은 불편함을 감수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는 편리한 제품들이 나와줘야 하고 이를 위해 국가 차원에서 규제와 투자가 필요하다.

국가는 이런 제품을 개발하는데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하고 파격적인 혜택도 줘야 한다.

나라와 나라, 기업과 기업의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에 쉽지 않다. 

하지만 환경이 망가지고 인간이 살 수 없는 세상에서는 나라도 기업도 있을 수 없다. 

답은 이미 알고 있으니 맞는 방향이라면 싸우면서라도 나아가야 한다.


밥이 되는 과학적 원리는 몰라도 아이를 위해 매일 밥을 짓는 것처럼 

기후변화에 대한 논리적인 설득력도, 환경문제에 인생을 던질만한 용기도 능력도 없지만

내가 깨끗한 곳에서 살고 싶고 내 아이가 더 나은 세상에서 살기를 바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열심히 분리수거하고 텀블러를 챙기고, 건조기 사용을 하루 더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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