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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투 Aug 14. 2021

아름다운 사람들


부다페스트에 주재원으로 1년 정도 산 적이 있다. 

거기 한인 주재원들이 열 올리는 일이 있었는데, 바로 고가의 그릇과 앤티크 가구를 사 모으는 일이다. 

차로 유럽 어디든 갈 수 있고 아웃렛이 곳곳마다 있으니 차 한 대 꽉 차게 멤버를 모아서 명품 그릇들을 사러 다녔다. 그릇을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정말 예쁘고 화려했다. 

그런데 몇몇 사람들은 그 그릇들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릇보다 몇십 배 비싼 진열장을 사서 거기에 고이고이 모셔두고 자랑만 했다. 

앤티크 가구도 한국보다 싸다고 많이들 샀는데 그 식탁에 흠집 날까 봐 애지중지했다. 

물건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모시고 살았다.

물론 좋은 물건이니 소중히 다뤄야겠지만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랄까...

나는 그때까지 일만 하느라 살림에 눈 뜨지 못해서인지 그 그룹에 동참하지는 않았다. 

원래도 몰려다는걸 안 좋아하고 그릇의 가치도 모르니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나중에 돌아와 보니 그 그릇들이 한국에서는 진짜 비쌌다.

나도 사둘걸... 지금 와서 후회막심이다 ㅋㅋㅋ


그런데 갑자기 예정에 없던 한국으로 발령이 났다. 

3년에서 5년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국으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이제 겨우 적응해 가는데 갑작스러운 발령에 어이가 없었지만 회사의 결정이니 따라야 했다. 

서유럽은 웬만한 곳은 전에 다 가봤으니 들어가기 전에 다시 가기 힘든 동유럽을 여행하기로 했다.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등을 쭉 돌았다. 


여정의 첫 숙박은 크로아티아에서 머문 가정집 호텔이었다. 

흰색 페인트칠이 된 2층 집이었는데, 고급스럽진 않지만 외관과 주변이 깨끗하고 잘 정돈돼 있었다.

실내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아늑했다.

호텔 주인에게 장애가 있는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을 돌보면서 직장에 다니기 힘들어 아이와 함께 있을 수 있는 호텔을 운영한다고 했다. 

 


1층은 주인 가족이 사용하고 투숙객은 모두 2층에 머물렀다. 식사할 때만 1층 식당에서 모였는데 

휠체어를 타고 거실에 항상 앉아 있는 그 집 아들이 매번 인사해주는 게 친근함을 더해줬다.

반듯한 옷차림과 잘 훈련된 친절함은 아니지만

진심으로 자기 집에 묵는 사람들을 반가워하는 마음이 따뜻했다. 

나이를 묻진 않았지만 15살에서 19살 중간 어디쯤 돼 보였다.

작지만 무엇하나 흠잡을 것 없이 잘 관리되고 집 같은 편안함을 줘서 일반 호텔보다 더 마음에 들었다.

투숙객들도 오가며 인사하고 다 같이 모여서 식사하는 분위기가 색다른 경험이었다.

(식탁이 하나라 출발 시간이 비슷한 여행객들이 자연스럽게 모여서 식사하게 된다.)

'대가족이 살면 이런 느낌이겠구나' 싶을 정도로 주인이 가족을 돌보듯 투숙객 하나하나를 세심히 보살폈다.


저녁 늦게 도착해 밤에는 잠만 자고 아침에 첫 식사를 했는데

그날 아침의 충격과 뭉클함은 지금도 생생하다. 처음 경험해보는 종류의 것이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그렇게 단정하고 품위 있는 식탁을 본 적이 없다. 

그 호텔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지만 식탁이 그 절정이었다.

식탁보나 컵, 접시 등은 집 앞 마트에 가면 얼마든지 살 수 있는 꽃무늬가 크게 그려진 우리가 보기엔 약간은 촌스러운 것들이었다. 메뉴도 식빵, 달걀, 베이컨, 과일 등 아주 소박하고 단순했다. 

하지만 그 차림새가 어마어마한 정성이 들어갔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마른 행주질을 열심히 하는 모습이 상상이 되는 반들반들 윤이나는 그릇, 깨끗하고 잘 다려진 식탁보와 냅킨, 우아한 동선을 그리고 있는 그릇들의 세팅 각도, 한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포크와 나이프의 정렬, 앉는 사람의 편안한 동선을 배려한 의자 배치, 거기에 주인의 성실과 애정 어린 숨결이 묻어있는 식당의 공기까지... 한동안 앉지 못하고 멍하니 테이블을 바라반 봤다.

일류 호텔에서 칼같이 각 잡히고 입이 쩍 벌어지게 화려하게 세팅된 고급 차림과는 다른 분위기의 

주인의 마음씀이 느껴졌다. 

물건에서 사람의 정성과 진심이 묻어날 수 있구나...

어느 최고의 호텔에 머물 때 보다 더 대접받는 느낌이었다.

'사람은 부유하거나 가진 게 화려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품위 있게 살 수 있구나' 생각했다. 


왜 비싼 명품 그릇과 앤티크 가구들을 접할 때 느끼지 못했던 감동을 싸구려 슈퍼용 컵과 접시에서 느낀 걸까.

사람이 쏟은 정성과 시간만큼 물건에서 빛이 나는 거겠지.

물건에도 사람의 마음이 베어 드나 보다.


부다페스트 우리 집은 MOMPARK이라는 쇼핑몰 바로  옆 아파트였는데, 그래서 장보기가 편했다. 지하로 내려가 쇼핑몰 마트에서 장을 보고 그 앞 카페에서 크루아상과 커피를 마신다. 그 집 크루아상은 지금까지 먹어본 것 중 가장 내 입에 맞는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파는 크로와상보다 좀 더 빵 느낌이 나는, 느끼함보다 고소함이 더 강한 크로와상이었다. 매주 토요일 아침은 남편과 그 집 커피와 크로와상을 먹는 게 루틴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마트 앞에서 커피와 크로와상을 먹고 있는데, 굉장히 남루한 옷을 입을 남녀가 과자 하나를 들고 마트에서 나온다. 아버지와 딸 정도 돼 보인다. 

테이블에 앉아서 과자를 뜯는데 우리나라 웨하스와 비슷한 과자다.

(마트 앞에 테이블과 의자가 세팅되어 있는 휴게 공간이 있다.)

과자를 하나씩 꺼내 들고 자기들끼리만 들릴 정도로 작게 박수를 치며 노래를 한다.

노래가 끝나고 술로 말하면 건배하는 것처럼 과자를 X자로 크로스 한 후 아빠가 딸의 볼에 입 맞춘다. 

헝가리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없어 정확하진 않지만 개인적인 느낌으론 딸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것 같았다. 

사람은 말로는 통하지 않는 육감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로 비유하자면 초코파이에 초하나 꽂고 생일 축하하는 분위기 정도 되겠다.

둘은 끊임없이 서로에게 속삭였는데 

아빠는 계속 이것밖에 못해줘 미안해하는 것 같았고 딸은 아니라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생일을 맞은 사람의 표정을 하고 쉬지 않고 아빠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렇게 한참을 축하하고 안아주고 볼에 입 맞추고 머리를 쓰다듬고 그들만의 의식을 치른 후 참으로 다정하게 우리는 절대 떨어질 수 없다는 듯 팔짱을 끼고 사라졌다.


그들은 소매가 헤어져 너덜너덜 해진 낡은 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더럽거나 지저분하진 않았다. 

오히려 얼굴에선 광채가 났다.

생일 상은 단출했지만 초라해 보이지도 않았다. 

내가 만난 누구보다 행복하고 풍요로워 보였다.

너무 비현실적인 장면이라 환상을 본 것인가 의심이 들기도 했다.

'천사를 볼 수 있다면 꼭 저런 모습일 거야'

그들이 눈물을 흘린다면 '사랑'이란 글자로 떨어질 것 같았다.


지금도 가끔 그들이 생각난다. 특히 그들의 눈빛이...

모든 부모가 자식을 바라보는 눈이 그러하겠지만 자식을 향한 사랑과 이것밖에 못해주는 미안함과 지금의 처지에 대한 서글픔과 하지만 딸과 함께하는 기쁨이 담겨있는 아버지의 눈빛과

'아빠 마음을 내가 다 알아요' 하는 듯 아빠를 향한 사랑과 배려와 고마움이 서려있는 딸의 눈빛이 

내 각막과 심장에 새겨져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지워지지 않고 있다.


나는 얼마나 그들처럼 행복한 표정으로 살고 있을까.

나는 얼마나 그들처럼 사랑의 눈으로 내 가족을, 이웃을 바라보았던가.


나는 주제 파악도 잘하고 허황된 욕심도 없다.

가깝게 지내는 주위 사람들이 모두들 우리 집에 놀러 오고 싶어 할 정도로 

남편과 아들과 별거 아닌 일상을 재미있게 산다.


하지만 살다 보면 이유 없이(이유가 있을 수 도 있지만) 인생이 허무하고 

내가 잘 살고 있는 건가 회의가 들 때가 있다. 

나이는 드는데 이뤄 논건 없고 불안해지기까지 한다.


도대체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한 번씩 마음이 복잡하고 이런저런 생각이 들 때,


그들을 떠올린다.


크로아티아의 그 호텔을 생각하며 매 순간을 성실과 진심으로 대하고 품위 있게 살기를.

가족과 이웃을 대할 때 천사들의 눈빛을 기억하기를.

그 아름다운 식탁과 아름다운 사람들을 떠올리면 심플해진다.

적어도 내 눈엔 코끝이 시리도록 아름답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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