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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투 Sep 24. 2021

스토커

나의 특별한 친구


< 스토커 >


"그럼 그렇지! 몇 달 잠잠하다 했다. 참 부지런도 하지 어떻게 한 번을 빼먹질 않냐,

한두 달은 또 지겹게 붙어서 안 떨어지겠구먼."

욱 하는 마음에 입 밖으로 내뱉을 뻔했다.

여름에 뜸하던 녀석이 몇 주 전부터 외출할 때 한 번씩 찾아오더니

이제 매일 대놓고 아침부터 나타나 따라다닌다.


이 친구를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때쯤이다.

정확히 몇 학년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고3 때 둘이 붙어 다니느라 공부를 제대로 못했으니 1, 2학년쯤 되겠다.

여고시절 만나서 이제 오십이 다 되어 가니 얼추 30년 지기라고 해야 하나?

오랜 시간 붙어 다닌 것에 비해서는 사이가 딱히 좋은 것도 아니다.

그 정도 함께 했으면 가족이나 다름없다거나 죽고 못 사는 관계여야 정상인데,

오히려 나를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이 친구를 마지못해 받아준다는 쪽이 맞겠다.

무슨 매력이 있어서 나에게 빠진 건지 모르겠지만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어떤 건지 알기에 차마 독하게 굴지는 못하겠다.

그나마 365일 날마다 귀찮게 하는 건 아니라 아직 봐주는 걸 수도 있다.

한여름이나 한겨울은 덥고 추운 날씨 때문에 꿈쩍하기 싫은지 얼굴 보기 힘들고,

모직 코트가 부담스러워지는 3,4월과 쨍하던 휴가철이 끝나가는 8월 말에서 9월 초쯤 꼭 찾아온다.


사람 마음은 다 똑같다.

나도 걷기 좋은 계절이 되면 미뤘던 약속도 잡고, 해 지면 집 근처 호수공원으로 산책도 가고 싶은데

이 친구 때문에 옴짝달싹 못 한다.

3월과 8월쯤 나타나기도 하고 싫은데 자꾸 친한 척 선을 넘어서 ‘38선’이라고 별명까지 지어줬다.

만나지 않을 때도 안부가 궁금하지도, 보고 싶지도 않다.

내게 이런 친구가 언제 있었나 싶게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일단 다시 만나면 한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붙어 다닌다.


하지만 함께 야외로 나가는 건 가급적 피한다.

밖에 나가면 이때다 싶은지 더 찰싹 달라붙어 얼마나 정신없게 만드는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다른 사람도 만나고 사회생활도 해야 하는데 자기만 봐 달라고 떼쓰는 어린애같이 어디든 따라다닌다.

"확 스토커로 신고해 버린다!"라는 말이 목젖까지 차올라 숨이 막히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해서 떨어져 나갈 상대가 아니다.

한데 날짜까지 정해놓고 오는 건 아니라

이 무렵이면 매일이 긴장되고 언제 갑자기 나타날지 몰라 노심초사다.

멀리 외출했거나 만날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기습적으로 찾아오면

이 친구의 심술을 말릴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눈치 챘겠지만 스토커 같은, 나의 지겹고도 특별한 친구는 '환절기 비염’이다.


이번에는 조금 빨리 찾아왔다.

다른 해보다 며칠 일찍 선선해졌는데 귀신보다 더 정확히 알고 나타났다.

정말 모기 눈곱만큼 시원해졌을 뿐인데 아침부터 콧물 대잔치다.

그동안 떼어내려고 한약이며, 건강보조식품, 유명 병원 치료까지 안 해본 게 없지만 별다른 효과를 못 봤다.

고3 때는 증상이 한참 심해서 독서실에서 코밑에 수건을 깔고 흐르는 콧물을 받아내며 앉아있었다.

그러니 공부가 될 리가 있겠는가.

아 얘만 아니었으면 내가 서울대 갔을 수도... 물론 없었겠지?


30년 정도 시달리다 보니 이제 지쳐서 짜증도 안 난다.

그냥 포기하고 콧물 나면 약 먹고, 약 먹으면 졸리고, 졸리면 지하철에서 입 벌리고 잠도 잔다.

그마저도 찬바람 부는 야외에선 먹으나 마나,

심할 때 밖에 나갔다간 눈물 콧물 범벅이라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까 두렵다.

혹여 만나도 코 푸느라 바빠서 제대로 얼굴 보고 대화도 못한다.

남들은 봄가을 싱숭생숭 엉덩이가 들썩일 때 내 앞엔 콧물 젖은 휴지만 쌓여갈 뿐이다.

한 번씩 너무 심할 때는 코를 없애버리고도 싶고 콧물만 질질 흘리는 인생 살고 싶지 않은 때도 있었다.

그런데 콧물 때문에 죽었다면 너무 없어 보이고 우습지 않은가.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는데 즐기기까진 못하겠고,

그냥 평생 같이 가야 할 친구처럼 그렇게 함께 살아간다.


이 녀석 아마 생애 가장 마지막까지 내 옆에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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