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난만

조그만 아이를 만났다.

by 모아

제법 긴 장마가 이 주째 이어지고 있다.

추적추적 하늘은 금세라도 엄청난 물폭탄을 터뜨릴 듯 잔뜩 찡그린 채 쉽사리 속살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몇 날 며칠 동안 햇빛 구경하기가 힘들어지니 기분도 덩달아 우울함이 더해간다.

습도가 80프로를 웃돌자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짜증 섞인 멘트만 옮길 뿐이다.

친목도모 정보공유 온라인 카페를 들락 거려봐도 온통 까칠함이 묻어 나오는 댓글들로 연신 말싸움의 연속이다.

이렇게 우기가 계속되면 사람들은 어떻게 변할까?

에어컨을 틀어도 그때뿐이라 어떻게 하냐라는 말만 되풀이된다.

'길에서 돈을 주웠어요.'

한마디에도 어디서 달려온 승냥이 때들처럼 원글자를 잡아먹지 못해 이빨을 드러낸 채 으르렁 거린다.

둥글게 모여 틈을 노리는 승냥이들.

재미없는 글들을 읽어 내려가는데 창밖에서 아이들 소리가 들린다.

'어 비가 왔는데 비 그쳤나?'

창문을 열어보니 여전히 추적추적 잔뜩 찡그린 하늘은 금세라도 물폭탄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런데 안갯속으로 가만히 보니 아파트 놀이터에 아이들이 있다.

비를 맞고 의미 없는 우산을 쓰고 뛰어다니며 신이 난 채 즐거운 비명을 질러댄다.

3명이서 술래잡기를 하는 것 같다.

머리카락은 이미 물과 땀으로 흠뻑 젖었다.

아아... 정말

-"나 잡아봐라..."

한 아이가 잡으러 오려고 하면 두 아이는 자지러지듯, 숨 넘어 갈듯 몸을 휘청이며 놀이터를 뛰어다닌다.

재밌을 것 같은데..... 찝찝함이 재미를 이긴다.

난... 내 기억 속 나는 어린 시절 단 한 번도 저렇게 생각 없이 마냥 즐겁게 뛰어놀아 본 적이 없다.

내 기억은 그렇다.

하늘에서 타고난 그대로 핀 꽃과 같다


아이는 순수하다.

어른들처럼 계산하고 깊이 생각하고 비교하고 하지 않는 순수 그 자체이다.

그런데 나는 하얀 백지장이 아니었던 것 같다.

늘 생각하고 비교하고 눈치 보고

어린아이답지 않다 라는 말을 많이 들었던 것 같다.

뭘 그렇게 눈치를 봤을까?

애가 뭘 안다고......

이렇게 하면 엄마가 힘들겠지, 이러면 엄마 욕 먹힌다.

어른들의 이런 한마디, 의미 없는 잔소리 하나까지도 나는 하나하나 기억하기 바빴다.

미술시간은 소매자락에 행여라도 물감이나 크레파스가 묻을까 소매를 접어야 했고

체육시간에는 행여 넘어지거나 옷에 먼지가 묻어 엄마가 또 힘들어 질까 눈치 없는 아이가 될까 봐 한없이 걱정만 했다.

아이들과 운동장을 뛰어 본 적도 없고 고무줄 띄기에 참여해 본 적도 없었다.

문방구에 파는 불량식품을 엄마 몰래 사 먹고 싶어 몇 번이나 문방구 앞을 오가면서 용기가 안나 "주세요"

소리를 하지 못했다.

친구들이 가져온 반찬이나 간식을 먹고 싶어도 '나 하나만' 소리가 절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정작 내 도시락을 열면 아이들이 '나도 하나만' '나도 하나만' 하면서 다 집어가 버리고 맨밥만 남는데...

그래서 집에 가서 얘기하면 어른들은 지나가는 말처럼

그 애들은 뭘 거지같이 자꾸 얻어먹으려 하냐?라고 해서 난 '나도 하나만'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엄마가 자꾸 뭐라고 해서 그랬나?

생각해 보면 똑같이 자란 동생은 안 그런데 나만 그런 걸 봐서 타고난 성향 탓이 크다 여긴다.

조카의 운동회에 갔다가 나는 알았다.

운동회만 보면 참을 수 없을 만큼 슬퍼져서 눈물이 났다.

누가 보면 안 좋은 일이 생겼나 싶을 만큼 갑자기 딱 운동회에 음악이 들리고 아이들이 서서히 모이고 계주가 시작되면 나는 엉엉 소리가 날만큼 울고 싶고 슬퍼져서 이내 자리를 떠야만 했다.

그렇게 어린 시절이 안타깝고 천진난만하게 놀 수 있는 그 순간을 누리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그런데 이대로라면 딱히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눈물이 나는 건지...

어린 시절의 나는 좀 가여운 아이였다.

나에게만....

남에게 보이던 나는 행복한 아이였을지도 모른다.

어른들에게는 온순하고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였으니까...

하루의 절반 이상을 엄마의 걱정으로....

어린이스럽게 지내지 못한 나만 아는 불쌍한 나였다.

꿈속에서 가끔 만난다.

조그만 나를


그 조그만 나를 붙잡고 엄마는 또 울고 있다.

아빠 때문에 매일매일

그 조그만 나를 붙잡고

사람들 앞에선 아무렇지 않아 하는데 집으로 돌아오면 또 운다.

아빠가 돌아오면 돌아올 시간이 가까워지면 엄마와 나는 지옥이 가까워 오는 경험을 한다.

오늘은 또 술을 마셨을까? 안 마셨을까?

시간이 늦어지면 질수록 엄마와 나는 다른 준비를 하여야 한다.

미리 내일 학교 갈 준비를 하고 내일 입을 옷을 챙기고 미리 씻고 세안 도구까지 챙겨 외갓집으로 가야 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엄마는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나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다른 친구 엄마들과 대화를 나눴다.

학교를 마치면 집이 아닌 외갓집으로 가는 편이 나는 훨씬 좋았다.

그나마 외갓집에서는 귀한 손녀였으니까

할머니는 할아버지는 그냥 나를 작은 아이, 사랑스러운 손녀로 봐주셨으니까

할 줄 아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일부러 못한다고 응석을 부려도 다 이해해 주셨으니까

혹시나 미운털 박혀 우리 집으로 가라고 할까 봐 걱정도 되었지만 할머니는 늘 엄마가 데리러 올 때쯤

전화를 했다. 그냥 두라고 여기서 재운다고...

하지만 어김없이 엄마는 나를 데리러 왔다.

말을 듣지 않으면 화를 낼 테고 그럼 엄마가 또 힘들어질까 봐 나는 때도 한번 써보지 못한 채 집으로 가야만 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할아버지 할머니의 손을 끝까지 놓지 못한 채 엉덩이를 들썩여 봐도 소용이 없는 걸 너무 잘 알았다.

가는 길에 엄마는 오늘은 아빠가 술을 마시지 않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런 날의 반복

그게 나의 어린 시절을 다 채워 버린 걸 안 것은 아주 한참 뒤....

어린 시절을 다 채우지 못한 불쌍한 아이가 자꾸 꿈에 나온다.

오늘도 난 그 아이를 만났다.

어른이 되어 한참 동안을 뭐 좋은 기억이라고....

나름 잊고 살았는데

요즘 꿈에 자꾸 조그만 여자아이가 나온다.

아무런 힘도 없어 보이는 가녀린 체구의 작은 아이는 참 가엾어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려 해도 눈치만 보는 아이가 행여 놀라 도망갈까 먼발치서 바라만 보았다.

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고 싶은데....

토닥토닥 등을 쓸어주며

-"괜찮아 내가 지켜줄게...."

긴 머리를 묶어 주며 나가서 신나게 뛰어 놀라고 얘기해 주고 싶다.

아니.....

또다시 그 아이를 만나면

그냥 꼭 안아 주어야겠다.

그냥 가슴 가득 아이를 안고

가만히..... 가만히....

언제까지나......... 괜찮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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