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배신

약속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는 나

by 모아

굳이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을 때로는 꺼내려고 하는 이유는

그냥 버릇이다.

넘어져서 생긴 딱지를 그냥 두지 못하고 연신 뜯어낸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흉 없이 아물듯 한데 오늘도 기어코 뜯고 말았다.

그냥 버릇이다.

내버려 두지를 못한다.

기다리는 게 힘들다.

가장 못하는 요리가 계란 프라이랑 계란 삶기이다.

왜냐면 기다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잘 알고 있다.

시간을 지키면 더 편하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시간이 다가오면 무서워서 결벽적이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쉽게 해 버리는 시간 약속이 나는 화가 난다.

지키지 못하는 약속이기에 그들은 단지 아이를 달래 볼 생각으로 서슴없이 시간 약속을 한다.

'엄마가 들어가면 조립해줄게' 어린 조카에게 엄마인 동생이 한 약속이다.

그 사이 할머니랑 잠들 거라고 그럼 된다고 얼렁뚱땅 상황을 모면했다.

우린 그날 12시가 넘어서 조카가 있는 집에 도착했다.

벨소리도 없이 살금살금 들어갔는데 소스라치게 놀랐다.

할머니는 잠들고 4살 배기 조카는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 옆에서 자는 척을 하며.....

나는 동생에게 화를 내며 지금 당장 블록인지 뭔지 조립을 해 주라고 했다.

나도 어린 시절 어른들의 약속을 기억하느라 힘들었다.

그런데 어른들은 번번이 나와의 약속을 어겼다.

하지만 매번 나는 속았다.

오늘은 해 주겠지. 오늘은 오겠지. 오늘은 샀겠지...... 그리고 오늘은 술을 안 마시고 돌아오겠지

몇 시까지 술 안 마시고 들어올게

이미 시간은 지나갔고.... 심장은 콩 쾅 콩 쾅.... 엄마는 짐을 챙기라고 하는데 나는 기다려보자 한다

아빠가 약속을 했다고

한동안 나는 매번 속았다.

그리고 화가 났다.

그리고 믿지 않았다.

아빠도 그리고 엄마도 세상 그 누구도

다 사기꾼이다.

어린 시절 걸핏하면 아이들은 약속을 잊어버리거나 아니면 대수롭지 않게 여겨 무시하거나 시간 따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비해 난 어릴 때부터 결벽적으로 시간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제발 시간 안에 와라.

여러 명이 모이는 일이면 한두 명 꼭 늦는 친구들이 생기지 말기를 간절히 바랬다.

아니면 그럴 것이니 벼루고 있는 것인지..... 그때는 알 수가 없었다.

시간 안에 오지 못한 친구를 타박하며 친구가 사과를 해도 내 분노는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고 하루 종일 그 친구와 말을 하지 않기도 했다.

혼자 분노에 차 씩씩 거리며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아주 어릴 때는 토라지는 걸로 조금 더 커서는 화를 참지 못해 친구들에게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죽을죄를 진 것 마냥 몰아붙이고 다시는 안 그런다 약속을 하는 친구에게 또 버럭 했다.

넌 약속이 버릇이냐고?

왜 그렇게 토라질 일 투성이이고 화만 났는지 내 어린 시절은 온통 화와 섭섭함의 연속이었다.

아빠는 심각한 환자였다.

아프지 않은 아니 정신적으로 아픈 중독자

알코올 중독자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커서 결혼을 하고 딸아이를 키우던 그때 까지도...

아빠는 매일 술을 마셨다.

병원은 가보라고 해도 절대 가지 않았기 때문에 40대 이후 건강 상태는 우리도 알 수가 없었다.

40 중반 어렴풋이 늑막염으로 그것도 물이 찬 채로 오래되어 고름이 되고 난 후 심각한 상황에서 병원을 갔었다고 들었다.

그것도 끌려서...

온 집안이 고름 냄새로 진동해서 외갓집 식구들이 강제로 끌고 갔었다

그 상황에서도 매일 술을 마시며 통증을 잊고 살았고 치료를 받는 중에도 술을 못 마시는걸 가장 괴로워했던 것 같다.

저녁이면 엉망이다가 아침이면 말짱하게 일어나 본인이 엉망으로 해 놓은 집을 치운다.

깨진 그릇이며 가구 문짝 밥상 따위를 본인이 치운다.

그러면서 물어본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그리고는 술병들을 챙겨 또 슈퍼로 간다.

그러던 언젠가 아빠가 술을 마시고 들어와 밥상을 차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치다가 또 고모에게 전화를 걸라고 수화기를 가리키며 악을 썼다.

엄마가 부랴부랴 달려와 수화기를 집어주고 전화기를 당겨 주려고 선 근처를 살피는데 엄마 뒤통수를 아빠가 갑자기 수화기로 찍으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아빠 손을 잡아당겼다.

그게 화근이 되어 그날은 전화기도 다 부서지고 방문도 날아갔다.


그러고 나면 엄마는 항상 내 탓을 했다.

그냥 엄마를 부르지 왜 네가 손을 잡냐고 그래서 더 화가 나서 저런다고

어떤 날은 네가 왜 낮에 그런 걸 물어봤냐고 그래서 아빠가 화나서 술 마신 거라고

끊임없이 내 탓만 하다 어느샌가 내가 말대답을 할 나이가 되어서는 서로가 서로를 탓하고 있었다.

그리곤 미친 듯이 싸웠다.

누구에게 쌓인 화인 지도 모르고 그냥 성질난 코뿔소 마냥 둘이서 그렇게 들이받았다.

나는 너무 섭섭했다.

나도 똑같이 피해자인데 이모도 삼촌도 모두 네가 첫째니까 이해해라 엄마가 기댈 때가 없어서 그렇다.

엄마가 불쌍하지 않니? 넌 장녀니까....

네가 참아라. 네가 들어줘라.

그럼 난... 난 어떻게 하라는 건가.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기댈 수 없고 밖에 가면 가정사라 더 말할 수도 없고

안으로 곪을 만큼 곪아 터진 난 어쩌란 말인가.


어릴 때부터 엄마는 동생과 내가 싸우면 내 등짝을 때리거나, 말대꾸를 하면 입을 때리거나, 거기서 화가 더 나면 의자와 같은 기물을 들고 와 나를 찍으려고 했다.

무섭고 서럽지만 끝까지 울지 않고 바락바락 대들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엄마는 나를 더 힘으로 누르려고 했다.

가끔은 엄마가 사과도 했다.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도 함께

하지만 그건 거짓이었다.

아이가 태어나서 유치원에 다니던 때쯤 엄마와 간단한 말싸움 끝에 엄마가 리모컨을 나에게 던졌다.

나도 화가 나서"이제 좀 고만하지... 너무한 거 아니야? 나만 보면.."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변에 있던 잡동사니들을 주섬주섬 통에 담아서 우르르 집어던졌다.

아빠에 대한 화풀이인가?

아빠를 너무 닮은 나라서....


딸아이는 아직도 그때 일을 기억한다.


아빠도 엄마도 나에게는 모두가 적이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이 또한 알아도 계속 속았던 나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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