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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울과 철학 Nov 25. 2021

신의 설계와 수정



인간은 무한에  대해 알 수 없다. 인간 이성의  뜰채는 무한을  담을 정도로 촘촘하지 않다. 개미의 지성이 10 이상의  수를  무한으로  인식한다고 가정해보자. 개미의  진화과정에서 10 이상의  수는  더 계산할 필요가 없는 큰 수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10 은 매우  작은 수일뿐이다. 우리의  지성이 무한으로  인식하는 것도  인간보다  더 고등한  존재가  본다면 작은  수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 이성의 뜰채가 무한을  담을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무한은 우연성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규칙성이 있는 수열은 유한의 범위에서 기술될 수 있다. 하지만 비순환 무한소수와 같은 수열은 불규칙하기 때문에  유한의 범위에서 기술되지  않는다. 즉, 무한은 그 자체 내에  불규칙성을 내재하고 있다.


무한을 담을 수  있는 존재는 신일 것이다.  우리는 무한의  이해 불가능성으로부터  신의 존재를 유추할 수 있다. 신의 특성은  무한과  마찬가지로 불규칙성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규칙성은  다른 말로 하면  예측 불가능성이다.

한편 신의  존재는 결정론적 세계관을  가정하게 만든다. 세상의  모든 일은 신이 설계해 놓았고 설계대로  세상사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결정론적 세계는 불규칙성과 배타적인 관계에  있다. 초기의 운동 조건들을  모두 계산하면  현재의  운동 상태가 도출된다는 고전적인 결정론은 신의  특성인  무한성, 예측 불가능성과  배치된다.


신의 설계에  따라 움직이는 우주에 불규칙성을 부여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신이 어떤 의도에서인지 설계를 수정한다는 점이다. 설계의 수정은  신의 무한성에  내재된 불규칙성을  우주로  끌어들여올 수  있게 한다.

신의 존재는 결정론적 세계관을 받아들이게 하지만  설계에 수정은 신의 무한성과 결정론적 세계관이 공존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이 설계를 수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설계의  수정이라는 개념 자체에는 신의 무오류성을 부정하는 의도가 깔려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설계했더라면 설계를 수정해야 하는 일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신도 오류를 범한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 오류를 언제든지 수정을 통해 바로 잡을 수  있으며  이러한 점이 신에게 무한성이라는 특성을 부여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두 가지 선택지를 알고 있다. 하나는 우리는 자유롭지 않고 전지전능한 신이 악에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는 자유롭고 책임도 지지만 신은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여러 학파가 교묘한 능력들을 모두 동원해 보았지만, 이 칼날 같은 역설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보태지도 빼지도 못했다.

  「시지프스의 신화」(알베르 카뮈) 中



내가 자살하지 않고 버텨낸 이유가 무엇인가? 신은 내 인생에 극심한 고난과  육체적, 심리적 고통을 설계해 놓으셨다. 그럼에도 나는 신의 설계가 수정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상황이 나아진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런 나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서서히 느끼고 있다.


신의 설계가 우주의 실재로 구현되는 것은 시간의 선후관계를 갖는 것도 아니고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갖는 것도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씨앗이 나무로 구현되듯이 설계되어있던 것이 실재로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운동의  모양을 하고 있다.

 흄이 지적한 바와 같이 원인과 결과의 인과율이 허상의 개념이듯이 시간과 공간의 개념도 허상이다. 우리의 이성의 틀속에도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신의 설계와 이의 구현인 실재 역시 시간적인 선후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실재는 설계에 배태되어 있던 것이므로 이는 모자관계라고 할 수 있다.

신의 설계는 실재를 낳고 실재는 다시 신의 설계를 낳는다. 실재가 설계를 낳는 것은 신이 오류를 수정하여 새로운 설계를 수행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즉, 신이 설계를 수정하는 것은 필연적인 과정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설계의 수정은 설계 속에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신의 설계가 무한의 성질 즉 예측 불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설계는 실재를 배태하고 실재는 설계를 배태한다. 실재가 설계를 배태하고 있다는 것은 개인에게  어떤 의미 일까?

고난에  빠진 인간에게 실재는 운명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실재는 또 다른 설계를 낳으므로 이 운명은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틀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점이 우리가 운명을 거스를 수 있는 이유이며 이점으로 인하여  우리는 깊은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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