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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울과 철학 Dec 03. 2021

어차피 고통이 계속되는 것이라면

우리가 글쓰기를 해야 하는 이유

나의 관심사는 부조리의 발견이 아니라 그것의 결과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하고, 아무것도 회피하지 않으려면 어디까지 나아가야 할까? 자발적으로 죽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져야 할 것인가?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中


세계의 도처에 깔린 절망과 부조리를 느끼고 우울에 빠진 사람에게 해결책은 무엇일까?  두 가지 잠정적인 해결책을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세계에서 다시 희망을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살하는 것이다.

 

그런데 첫 번째 해결책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이성과 합리성으로 구성된 세계, 그 안에서 행복을 찾는 인간의 이념 속에는 수많은 모순이 있고, 이 모순들은 종국에는 해결 불가능함을 현대 철학이 철저히 밝혀 왔다. 인간이 내재하고 있다는 오성의 개념들은 그 근거가 빈약하고, 이러한 오성의 개념들로 재구성한 세계와 자아는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실제로 세상은 그렇게 구성되어 있지 않다. 세계와 나는, 절대 불변하는 신의 이념의 그림자가 아니다. 우리의 인식은 불완전하고 불명확한 것 투성이이며,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 역시 이성의 틀에 따라 명명백백하게 분류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신의 뜻은 우리의 이성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와서, 세계의 부조리와 절망을 철저하게 느낀 뒤에, 다시 이성으로 회귀하려는 노력은 속임수에 불과하다.


자살은 해결책이 될 수 있는가?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우리의 고통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죽음 뒤에 모든 고통과 절망, 부조리가 사라진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 죽음 뒤에도 우리의 정신은 계속 존재하고, 거기에 담지되어 있는 고통과 부조리는 영원히 지속될지도 모른다. 존재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큰 실수이며 치명적인 잘못이 될 수도 있다. 죽음을 통해 구원, 즉 고통의 사라짐을 경험할 수 있다는 생각은 너무 순진한 것이 아닐까?  이는 너무 낙관주의적인 생각이다.

시오랑은  "낙관주의자만이 자살을 한다. 그 낙관주의자들은 더 이상 낙관주의자가 될 수 없는 낙관주의자이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다른 사람들(염세주의자)에게 왜 죽어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라며 자살은 구원이라는 낙관주의의 위험성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진정하고 상황을 더 냉정하고 염세적으로 보아야 한다. 낙관주의적 망상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물론 우울증의 극단에 있는 사람이 자살을 결심할 때 그는 자살이 영원한 구원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당장의 고통을 끝내거나, 이 고통을 잊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같기 때문에 자살을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살은 고통의 끝이 아닐 수도 있다. 자살한 후에도 고통은 정지하지 않고 계속될 수 있는 것이다.


생각할 수 있는 힘과 기본적인 운동 기능을 갖고 있는 한 우리는 자유를 행사해 삶을 끝낼 수 있는 무기를 소유한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그 무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너무 낙관적인 행동이 될 것이다. 우리의 자살로 구원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사이먼 크리츨리, <자살에 대하여> 中



세계의 부조리와 우리 안의 절망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시지프 신화>에서 가장 중요한 주장은, 자살은 부조리에 대한 정당한 대응이 아니라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부조리에 맞선 예술창작이다. 니체가 말했듯이 우리는 진리로 인해 죽지 않기 위해 예술이 필요하다.

 예술을 통해 부조리와 절망을 회피하자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태를 전망하는 관조의 정신이다. <자살에 대하여>의 저자 사이먼 크리츨리는 "여기서 핵심은 '다정한'과 '무관심'이라는 단어의 조합이다. 카뮈에게 무심함은 냉소가 아니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세상의 아름다움과 야만성 모두에 열린 채로, 다정함과 이해를 품고 세상에 다가가 세상을 경험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경험을 예술로 변형시킴으로써, 죽음보다 훨씬 더 오래 지속되는 부조리한 창조 행위에 참여한다."라고 하였다.

글 쓰기는 위로가 될 수 있다. 글쓰기를 한다고 우리의 절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울한 전망은 계속해서 지속될 것이다. 세상이 절망과 부조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망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감정들은 서서히 잦아든다. 글쓰기를 통해 이러한 잦아듦을 가속시킬 수 있다.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오류로서 그 질문은 그만두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사태를 차분하게 묘사하는 글쓰기, 부조리를 유지하는 예술 행위, 그리고 조용히 그 끝을 상상해보는 창의력이 필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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