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울과 철학 Dec 13. 2021

분명 중요한 것이 있다

그러므로 신이 존재해야 한다


인간의 불멸성은 신의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 인간의 불멸성 없이는 무엇도 말이 되지 않는다. 어차피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므로 우리가 무엇을 하든 안 하든 아무 상관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신의 존재는 '도덕적' 필연성을 지닌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신이 존재한다는 어떤 확실한 경험적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은 신의 존재를 확실히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의 존재는 도덕적으로 필연적 일지 모르나 동시에 과학적으로 혹은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 미하엘 하우스켈러, <왜 살아야 하는가>




 우리가 사는 세계는 분명히 올바르지 않다. 무수한 사람들이 전쟁과 재해로 목숨을 잃고 있고, 내 이웃과 가족들이 악의에 찬 범죄의 희생양이 되고 있으며, 고독한 개인은 고통과 번뇌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신이 존재한다면, 왜 세계가 이토록 처참하게 되도록 방치하고 있는 것일까? 오히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 더 이성적인 조치가 아닐까?  세상은 아무런 질서도 규칙도 없이 우연적인 사건들로 이루어지는 무신론적 세계일까?

신이 없다면 세상을 살아가는 윤리도 도덕도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행동의 절대적인 기준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온갖 범죄를 스스럼없이 저지르고, 이득을 위해서라면 천륜도 저버릴 것이며,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개념은 아무 곳에도 발붙이지 못할 것이다. 세상은 공리주의,  비인간적 합리주의, 과학만능주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의 각축장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2 곱하기 2는 4'라는 개념보다 더 크고 본유적인 것이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세계를 더 나은 무엇으로 바꾸려는 의지이다. 지금의 사태들에 만족하지 않고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변화시키려는 욕망이 우리에게는 내재되어 있다.

 내가 행복하길 바라고, 가족이 행복하길 바라며, 이웃이 행복하길 바란다. 엄마를 찾고 있는 소녀를 보면 쉽게 지나치지 못하고 도움을 주려한다. 강 위에 뛰어든 여인을 그냥 지나친다면 그 자책감이 돌고 돌아 뜻 모를 웃음소리로 나타날지도 모른다. 우리는 타인에 대해 연민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연민은 더 나아가 사랑으로 발전하고 사랑은 더 나아가 인류애로 발전한다.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양심과 연민, 사랑의 감정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신의 계획이 아니라면 이러한 감정들은 불필요한 것이다. 혹자는 게임이론을 이야기하며 인간의 이타성을 개체나 종족의 근원적인 이기심에서 찾으려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러한 과학적인 설명들이 놓치는 것이 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합리적인 선택만을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개인적인 안온을 버려가면서까지 사랑과 인류애를 실천한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내가 금방이라도 완전히 소멸해서 결국 무엇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어째서 조금의 변화도 없이 여전히 소녀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이며 내 야비한 행동에 수치심을 느끼는 것인가?

 - 도스토옙스키, <우스운 자의 꿈>




 세계의 처참한 모습은 더 이상 신을 상정하지 않게 만든다. 이성에 따르고 신에 복종하며  합리적으로 사는 인류의 모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신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는 곳은 자유의지가 숨 쉬는 우리의 내면이다. '2 곱하기 2는 4'라는 명제에 만족하지 못하는 나, 사태들의 어지러움을 해결하고 더 반듯한 세계를 만들어 보려는 자유의지, 그 안에서 촉발되는 연민과 사랑. 이런 것들은 신의 뜻과 계획이 아니었더라면 우리 속에 존재할 필요가 없었다. 신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우리가 그것을 통해 신을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결정론적 사관은 오히려 우리를 신에게서 멀어지게 한다. 우리의 열정과 사랑, 그리고 이를 실현하게 하는 자유야 말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강력한 수단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고통의 해답을 신에게서 찾으려 하지 않는다. 고통이 커질수록 사람들과 신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는 듯 보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우리의 내면에는 신의 증거가 깃들어 있다는 것. 척박한 삶 속에서도 세상을 견디게 해 주는, 불쌍한 자들에 대한 연민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신의 존재가 아니라면 그 원인을  찾기가 너무 어렵다. 우리가 고통을 벗어나고자 계속 노력한다면, 그리고 고통받는 가족과 이웃들을 연민하고 사랑한다면 내면의 신과 대면하는 때도 멀지 않은 것 아닐까

 


작가의 이전글 가장 잘할 수 있는 건 쓰러진 채로 있는 겁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