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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an Mar 19. 2024

나를 찾아 나로서 나아가는 길

더 늦어버리면 안될것 같았다.

11월 중순 쯤이었나, 알 수 없는 무기력함과 함께 지루한 날들이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사실 갑작스럽다기보단, 애써 외면해오다 어느 순간 직시하게 된것 같다.

"아, 이렇게 회사원이 되어가는건가?"


일적인 것 외에도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생각이 많아지는 시기였다. 성인이 된 후 알게된 사람들을 진정으로 알고 지내는 사이라 할 수 있는가, 소개해준 지인과 멀어지면 끝나는 사이는 아닌가, 나 조차도 저 사람들에게 바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기에 다가가려 한 것은 아닌가와 같은 끝없는 생각에 지쳐있었다.


모든것에 싫증이 난 나는 조금 쉬면 괜찮겠지란 생각에 그렇게 미국 행 티켓을 끊었다.

거의 3주를 감사하게 쉬었다. 10년 넘게 곁을 함께한 친구와 아무런 근심 걱정없이, 일 걱정 없이 편하게 쉬다왔다. 그럼에도 다시 알 수 없는 무기력함이 찾아왔다.


이 무기력함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궁금했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책과 영화, 음악, 취미, 운동 등 여러가지를 시도해봤지만 혼자 있을 때 오는 무기력함은 해결되지 않았다.

이 무기력함이,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나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나에 대해 정면으로 마주보기 시작했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그 사유의 과정을 모두 적을 순 없겠지만 그래도 아래에 남기고자 한다.




멀리서 나라는 사람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했다.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지금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해 우선 의구심을 품어보기로 했다.

난 어떻게 좋은 조건에 이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을까?

난 어떻게 또래 친구보다 금전적으로 있어 크진 않아도 여유로울 수 있었을까?

물론 나의 노력과 능력도 있었겠지만, 주도적으로 이룬 것은 없었다.

내가 이룬 성과, 내가 이룬 자산 모든 것이 사실 종속적이었다.

회사에 취직하게 된 것도, 좋은 조건에 영입 된 것도, 또래들보다 금전적으로 여유 있는 것도 사실 종속적인 구조 속에서 가능했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자기 비하와 같은 부정적인 느낌이 들었지만 이 느낌을 해소하기 위해선 더 사태를 정확히 보는것이 중요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어떻게 살아왔는가?", "애초에 종속적인 삶을 살던 사람인가"와 같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계속 던졌다. 그에 대한 답은 '아니다'라고 내렸다.

감사하게도 내 삶에 있어 모든 선택은 내가 했고, 부모님께서는 응원과 그에 따른 지지와 지원을 보내주셨다.


내가 필요한 정보가 있으면, 그 정보가 있는 사람을 찾아 도움을 요청했고

내가 가고 싶은 학과를 내가 정했으며, 내가 주도적으로 휴학을 결정하고 일을 시작했다.

내가 관심있는 분야의 스타트업에서 일을 하던 초기만 하더라도, 주도적으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계획했던 것 같다.


언제부터 나는 그럼 종속적이게 된 것일까?

누군가의 회사에서 일을 한다해서 종속적인 것일까? 그건 충분한 답이 안되었다.

그렇다면 좋은 조건이 나를 종속적이게 만들었을까? 그것도 큰 영향은 없다라고 생각한다.

곰곰히 생각을 해보다 내린 결론은 '방향성이 없는 상태' 였다.


변화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유지되는 안정감에서 점차 욕심과 욕망, 방향성을 잃어갔고 종속적이게 된 것 같다.


'내 회사가 아니다.' 라는 생각도 솔직히 들었다.

의사결정의 주체는 위에 분들에게 있었으며 그 결정과 의견들 사이에서 나약하게 휘청이는 나를 보며 더 놓았버렸다. 무엇보다 이 사업 분야가 나의 전문 분야도 아니고, 관심분야도 아니라는 점도 크게 작용한 것 같다.


'방향성이 없는 상태' 가 되자, 나의 수준은 거기서 멈췄고 내가 도달할 수 있는 높이도 여기까지로 멈추게 되었다.


무심코 잊고있던 나의 주도성을 떠올리게되자, 무기력함은 점차 없어지고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자기파괴' 그것은 현재의 것을 무조건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재의 것을 제대로 응시할 수 있는 높이를 갖는 것. '파괴'는 그 높이에서라야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
'파괴'는 새로움을 기약하는 일이다.새로운 생성이란 자기 주도적 시선으로 세계를 보고 스스로 자신의 나아갈 길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스스로 그 길을 결정하지 못하는 한, 항상 종속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종속적인 한, 우리는 주도권을 잡고 자신의 삶을 꾸리거나 자신이 속한 사회의 새 방향을 이끌어내기 어렵다.




어떠한 선택을 해야할까?


미국을 다녀와서 개인 SNS에 쓴 글이 있다.

"올해는 남 눈치 보지 않고, 설령 피해가 가더라도 내 인생을 살아보자. 지금이 아니라면 이렇게 자유로울 수 없고 지금이 아니라면 더 이상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와 같은 글이었다.


올해 혹은 내년 중으로 확실한 방향 혹은 진척사항이 없으면 더 늦기전 대학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에 썼던 글이다.


복학까지 나에겐 1년 혹은 길어봤자 2년의 시간이 남았다.

어떠한 선택을 해야할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아래는 내가 생각한 옵션들이다.


헬스케어사업을 멋지게 성장시킨 후 분사하여 회사의 대표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부회장님과의 약속)

회사를 다니며, 겸업/부업/사이드프로젝트를 통해 다른 파이프라인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우선, 모든 것을 내려두고 나에 대해 생각한다.


첫 번째 항목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나를 위해 선택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관심있는 분야가 아니며 무엇보다 내가 나약하게 휘청이는 모습을 직시한 곳이기도 하다.

시대 흐름상 정말 운이 좋게도 분사하여 한 회사의 대표가 된다면 과연 만족할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구조속에선 주도적으로 나아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확실한 생각이 든다.

난, 내가 주도적으로 다시 살아가고 싶다.


두 번째 항목은 솔직하게 구미가 당겼다.

회사 일을 빠르게 처리하고, 겸업/부업/사이드프로젝트를 진행하면 수익 파이프라인이 두개가 된다.

또 확률적으로 파이프라인이 두개이기에 앞선 첫 번째 선택지보다 확률적으로 단기간에 돈을 벌기 쉬운 구조였다.

그럼에도 이것또한 선택하면 안되는 선택지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우선 나를 믿고 맡겨준 사람들에 대한 배반 행위라고 생각이 들었고 (이제는 떳떳하고 싶다.)

한가지에 자신이 없어, 보험을 드는 이 구조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 이상 회피하고 싶지 않다.)

두개 모두를 잡으려다, 두개 모두 잃게 되는 선택지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세 번째 항목은 고심끝에 결정한 내 최종 결정안이다.

나라는 사람에 대해 알고 싶다라는 강한 욕구가 생겼다.

나에 대해 깊이 알고, 꿈을 꾸고, 보이지 않는 흐름을 읽어 장르를 만들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다.

판 안에서 전술을 짜는 사람이 아니라, 판을 짜는 전략적 주체가 되고 싶다.

당장 회사를 다니며 버는 돈보다는, 이러한 시기를 가지는 것이 맞다라고 생각이 든다.

지금 나이에 적지 않은 고정적 수입이 크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이렇게 정체되며 놓치는 기회비용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돈이 부족하면, 알바라도 하며 나에대해 알아가고자 한다.


꿈꾸는 삶이란 바로 '나'로 사는 삶입니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 자신의 내면적 욕망이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절대 타인의 꿈을 꾸어주거나 대신 이루어줄 수 업습니다. '나'는 꿈을 꿀 때 비로소 진정한 '나'로 존재합니다.




당장 어떻게 살 것인가?


지금 벌어들이는 수입이 10년 뒤에도 놓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수입일까? 전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에대해 알아가고자 하는 욕구를 무시한다면 나중엔 더 크게 방향성을 잃을 것이다.

이기적이더라도, 이기적이게 행동하고 싶다.

나라는 사람이 바로 서고, 그 위에 나의 꿈과 직업이 서야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일보 후퇴하는 것으로 남들이 생각할 지 몰라도,

얽매여있던 궤도를 이탈하여, 나만의 길을 만들고자 한다.


나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어떤 사업을 할지는 정말 모르겠지만,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는 알게 되었다.


독립적인 결정에서라야 지속적인 풍요와 번영이 보장된다. 독립적이지 못한 곳에서 형성된 종송적 풍요와 번영은 항상 흔들리기 마련이다. 주도권을 잡을수 없기 때문이다.


*인용문은 존경하는 어른 최진석 교수님의 '탁월한 사유의 시선' 책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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