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옥을 모으듯, 많이 듣다 보면
나는 지독한 내성적 인간이었다. 남들 앞에 나설 때마다 오금이 저렸고, 여러 명 사이에 껴 있으면 말도 잘 못했다. 요즘 유행하는 MBTI식으로 이야기 한다면 '극 I' 성향까지는 아니어도 조금 많이 기울어진 'I'였을 것이다. 왜 극에 달하는 정도까지가 아니었을 거라 추측하냐면, 그래도 주목 받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았던 것 같기 때문이다. 인간은 원래 모순 덩어리랬나. 그렇게 긴장을 하면서도 학예회 때마다 대본을 써서 친구들과 연극을 꾸렸고, 고등학교 때는 힙합을 좋아해서 남몰래 공연도 하는 사고도 치고, 대학교 때는 바들바들 떨면서 축제 무대에도 지원해 나가기도 했다. 나름 선방한 무대는 손에 꼽을 정도고 대부분 시원하게 말아먹었지만, 인생에 좋은 경험이었다. 나는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I였다.
군대에 다녀오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대학교에서 토론 수업도 하면서 멘탈이 정비되자, 나는 더 이상 떨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저절로 되었다기 보다는 나 나름대로 피터지는 노력이 필요했다. 의식적으로라도 E가 되어야만 하는 순간을 알고, 그때만큼은 E처럼 말하고 행동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교육 전공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언어 교육 이론을 접하게 되었는데, 나는 그동안 내가 공교육 10년이 지나도록 영어를 드릅게, 아주 드으릅게 못하는 이유를 새삼 다시 깨닫게 된다. '일반적으로 내성적인 학습자는 표현 영역에 있어 약한 모습을 보인다.' 대충 이런 맥락의 내용이 이론서에 있었다. 이야, 그토록 바꾸고 싶었던 내향적 성격이 내 글로벌 라이프의 첫 단추부터 부서뜨리려 했었다니.
이론서에 언급된 만큼이나 나도 이 말은 부정할 수는 없다. 어느 정도 맞다고 생각한다. 내성적인 사람은 자기 검열이 발동되기 쉽다. 주로 '말하기 전'에 생각한다. 'Do you~'가 맞나? 'Are you~'라고 해야 맞나? 문법에 과도하게 몰입한 나머지 그 되새김은 고교시절 주입식으로 암기한 5형식이 어쩌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눈 앞에 외국인은 말똥말똥 쳐다보면서 점심 먹은 게 얹혔나하고 걱정할 뿐 설마 이 사소한 부분 때문에 주마등처럼 기억을 끄집어내는 사투를 벌일 줄은 모를 것이다.
하지만 이 내성적인 성향이 간혹 언어 습득에서 장애적인 요인으로만 생각되기 쉬운데, 사실 이것이 장점으로 살린다면 장애는커녕 언어 학습에서 정말 무서운 무기가 된다. 해당 언어에 학습 동기가 어느 정도 있다는 전제가 깔리지만, 이게 충족되면 입력량이 넘쳐나고, 이것이 반복되고, 머릿속에서 하나의 체계가 완성된다. 여기에서 체계라 한다면 문장 구조라고 말하고 싶다. 예를 들어 한국어를 배우는 한 학생이 어떤 남자 아이돌을 극렬히 덕질하는 와중에 수많은 영상들을 보면서 한국어를 배우다 보면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문장의 여러 버전을 듣게 된다. '당신은 밥을 먹었습니까?'라는 맥락으로 '여러분 밥 먹었어요?, 'OO은 밥 먹었어?', '모두 식사하셨어요?' 등의 문장들을 반복하는 것이다. 아마 그 가운데에서 공통 분모를 찾고 순서를 인지하게 될 것이다.
외향적인 사람들은 아이가 언어를 배우는 '습득'과정과 유사하게 언어를 배우고 사용하기 때문에 유리하다고 한다. '너 밥 먹었어?'를 말하고 싶지만 처음에는 '너, 밥?', '밥먹어? 너?' 등 말도 안 되는 문장을 구사하면 마음씨 좋은 원어민 한국어 화자는 '그게 아니고 (멍충아), 너 밥 먹었어? 라고 하는 거야.'라고 고쳐준다. 그렇게 발화 - 오류 수정 - 재발화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오류를 별로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구강 근육도 그에 맞춰서 활성화가 되고 선순환이 된다는 것인데 사실 위에서 다소 내성적인 사람들도 혼자서 끊임없이 오류 수정을 하기 때문에 같은 양이라면 거기에서부터는 성격차이보다는 누가 더 언어 감각이 예민한가의 문제 아닌가 싶다.
중급반을 가르치다 보면 말을 겁나 잘하고 말하기 좋아하는 학생이 반에 한두 명 정도는 꼭 있는 편이다. 이 친구들은 본인이 재미있어하는 화제가 나오면 쉬는 시간, 수업 시간 할 것 없이 재잘재잘거린다. 수업 분위기가 활기차게 된다는 점에서는 정말 보배같은 학생이다. 하지만 유창성이 좋다고 그 학생이 한국어를 정말 잘하는 것은 아니다. 나도 처음에는 의외였다. 이렇게 자신있게 말하는데 같은 3급에서 유급을 두세 번이나 한 걸까. 언어 감각은 예민하지만 정확도를 너어무 신경 안 쓴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런 학생일수록 기대가 커지는 법이다. 그러나 말하기 시험을 볼 때가 되면 배신감이 들 정도로 와르르 무너진다. 곧잘 뭔가는 말하는데, 채점을 하면 바닥이다. 노오력을 안 했거나 안타깝게도 체계적인 것에 민감하지 않은 것이다. 전자가 대부분이기는 한데 아무튼 그렇다.
그러면 이 시점에서, 300m 밖에서 봐도 MBTI가 I로 시작할 것 같은 아이가 의외의 활약을 하게 된다. 어머나 샹, 수업 시간에는 그렇게 수줍어하더니 말하기 시험 시작되자마자 언더독의 반란이라도 일으키듯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한다. 그래 해냈구나. 겁나 듣고, 겁나 연습했더니 되는구나! 수업 시간에 그렇게 말을 시켜도 꿀먹은 벙어리더니! 나는 마치 이게 바로 '언어폭발' 단계인가 싶어 마치 내 아이가 첫 옹알이를 뗀 것마냥 속으로 경이로움을 느끼곤 한다.
그래서 요즘도 첫 학기가 시작되어 15명 안팎으로 모이면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물론 재잘재잘 E들은 늘 고맙고 기특하다. 하지만 이 교실 어딘가에서 드래곤볼 카카로트마냥 원기옥을 겁나 모으고 있을지 누가 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