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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굶찮니 May 06. 2024

고장 난 손꾸락

역시 글은 자주 써야 는다

일을 핑계로 몇 개월간 글을 안 썼다. 

그렇다. 안 쓴 거다. 못 쓴 것이 아니라. 


이제는 구태여 변명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분명 예전 같았으면 온갖 바쁜 척을 해대며 글을 '못' 쓴 것에 대한 이유를 두세 가지 정도는 늘어 놓으며 나를 합리화했을 것이다. 


"아, 요즘 친한 동생과 시나리오 작업하는 것이 있어서......."

"요즘에 본업이 바빠, 오전, 오후 수업이 다 있다 보니까."

"집에 고양이가 몸이 많이 안 좋아. 고양이를 안 키우기는 한데, 뭐 아무튼 그렇게 됐다."


뭔가 있어 보이도록 변명하면서 '그래, 그래서 내가 글을 못 쓰는 거야'하고 합리화를 했다. 마치 두 달 전에 헬스장에 호기롭게 등록해 놓고서 한 달이 넘도록 운동을 쉬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글쓰기'란 겁나 하기 귀찮지만 꼭 해야만 하는 헬스장 운동같은 것이 아닐까. 


이렇게 게으르디 게으른 자가 선생이랍시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여러분, 언어는 매일 조금씩 꾸준히 하는 거예요. 하루에 많이 하지 마세요. 매일 하세요.' 그 단순한 원리를 나조차도 못해서 새로운 언어 시작하겠다고 한 지가 반 년이 넘었는데 여태 그 나라 말 '안녕하세요'밖에 습득하지 못했다. 내가 도전하고자 한 언어는 베트남어와 러시아어인데 좀처럼 진전이 없다. 


하도 글쓰기를 쉬다 보니 이제는 키보드 위에 놓인 손이 어색해서 갈곳을 잃은 것처럼 정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꼴을 보고 만다. 와, 도대체 이놈의 손꾸락들은 어떻게 고장이 났길래, 멍때리고 있으니 학교 인트라넷에 로그인해서 처리할 일도 없는데 출석부나 끄적이다가 정신을 차렸다. 분명 다음 글감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손꾸락들은 평소 습관대로 로그인을 하고 있다. 이게 그 유명한 파블로프 뭐시기냐. 


어린이날이 지난 대체공휴일인 5월 6일, 나는 정말 큰맘 먹고 오로지 옷을 사기 위해 홍대 거리로 나섰다. 큰맘을 먹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옷을 사야하는 부담감이 클수록 결정 장애가 와서 아무것도 못 사는 경우가 허다해서 정말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그냥 사람 많은 곳이 너무나도 싫다. 이리저리 사람들에 치이다가 대충 '이거라도 살까?'하며 바지 몇 개, 셔츠 몇 장을 손으로 훑다가 돌아올게 뻔했고 정말 그렇게 되어 버렸다. 예전부터 옷, 신발에 대한 쇼핑을 할라 치면 의욕이 팍 떨어지는 것이 이쯤이면 성향을 넘어 습관같기도 하다. 


물론 여기에도 변명 거리는 달면 그만이다. '손이 가는 옷이 없어서'. 아니 그럴 거면 왜 나온 거니? 그러게 평소 주말에 쳐 자지 말고 아이쇼핑이라도 자주 나오든가. 그러면 뭐라도 하나 건져서 왔을 것을. 


눈코뜰새 바쁜 요즘, 혹시 내가 일 중독인가하고 되새겨보기도 했지만 그냥 책임감에 할 뿐 일을 못해서 안달난 사람은 아닌 것으로 결론을 지었다. 퇴근이 너무나도 간절했고 주말이 너무 맛있으니까요. 지하철에 한껏 몸을 찌그러트려 가도 출근할 때 마음과 퇴근할 때 마음은 천지차이니까. 그런데 너무 반복하다 보니 너무 기본적인 것들이 낯설어져 가고 있다. 글쓰기, 쇼핑하기, 운동하기 등등. 아는 사람들에게 연락하기도 너무나도 어색해서 안 그래도 소심한 성격에 점점 사람들을 잊기도 하고 그들로부터 잊혀지기도 하는 것 같다. 갈곳 없는 손꾸락이 그 쉬운 메시지 하나도 어떻게 보냈더라 하면서 망설이고 있더라. 


그래도 결국 '못' 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이다. 귀찮아서 안 했고, 깜빡해서 안 했고,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완벽하게 끝낼지 몰라서 안 한 거다. 예전보다 매사의 기준은 높아졌지만, 어떤 일의 성패에 대해서 기대치도 낮아졌다. 그래서 참 요상한 사고 방식이 생겼다. 


'기왕 할 거면 제대로 된 것을 원하지만 그럴 것이 아니면 굳이 시작 안 해도 큰 상관이 없어.'


가령 옷을 산다고 치면 내 마음에 꼭 드는 옷을 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적어도 80% 이상 내가 원하는 사이즈에 원하는 재질에 원하는 색이어야 한다. 거기에 투자할 돈과 시간도 확보했다. 하지만 그런 훌륭한 것을 건지지 못해도 입을 옷은 아직 많이 있다. 굳이 안 사도 된다. 그럼 사지 말까? 그래 다음 달에 사자. 안 사도 당장에 죽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하면 짧게는 두 달 뒤나 길게는 일 년 뒤에야 쇼핑에 성공한다. 미루기 끝판왕이렸다. 


어쩜 그렇게 속도 없이 사니, 라고 물어본다. 내가 나같은 자식이 하나 있다면 속이 터지고도 남을 것이다. 아직 더 달려야 하고 아직 더 목말라야 할 때인데 벌써부터 성인군자처럼 속절없이 태평하다니. 그러다가 정말 좋아하는 글쓰기조차도 완벽해질 때까지 안 쓸 참인가 묻고 싶다. 저놈의 고장 난 손꾸락을 어떻게든 해야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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