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이즈 Sep 21. 2023

불혹

1부

프롤로그


*

어서 오십시오. 안 쪽으로 들어가십시오. 좁은 기내 복도를 따라 열 발자국 정도 걸었다. 기내 창가 쪽 자리에 이십대로 보이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난 담요와 헤드셋이 올려진 통로 쪽 자리를 정리하고 앉았다. 좌석 안전 벨트를 몸에 맞게 착용하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온몸에서 일어나는 감각에 집중했다. 드문드문 얼굴이 떠올랐다. 딱히 누구라 부를 수 없는 얼굴들이었다. 온몸에 스산한 바람이 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묘한 열감이 일기도 했다. 비행기가 곧 이륙하겠습니다. 기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잠시 후 승무원이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내 옆자리 여성에게 등받이를 똑바로 해달라고 요청했다. 옆에 계신분이 일행이신가요. 비행기 좌석이 여유가 많으니 뒷 자석으로 옮기셔도 됩니다. 옆자리 여자가 주섬거리다 내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나는 안전벨트를 풀고 벌떡 일어나 복도 쪽으로 몸을 피했다. 여자는 굼뜬 몸짓으로 뒷 좌석에 옮겨 앉았고, 난 다시 원래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얼마 후 기내식을 나눠줬다. 비빔밥과 뭐시기가 있습니다. 내 귀엔 비빔밥만 들렸다. 비빔밥 주시고 카스 하나 주세요. 좁디좁은 좌석 테이블이 꽉 채워졌다. 영화나 한 편 볼 요량으로 K무비에서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제목의 영화를 골랐다. 영화가 시작되고 비빔밥은 입으로 한 입이었다. 맥주 한 모금을 마시고 다시 비빔밥을 한 입 하는데, 영화에서 염정아와 류승룡이 갑자기 노래를 시작했다. 왜였을까. 눈물이 글썽거렸다. 눈물이 글썽이다 떨어질까 두려워 냅킨으로 코를 푸는 척하면서 눈을 닦았다. 다시 글썽였다. 안 돼. 안 돼. 비빔밥을 먹으며 비행기에서 울면 이상해. 눈물은 다시 흘렀다. 또 냅킨으로 코를 푸는 척하면서 눈을 닦았다. 빠르게 비빔밥을 먹고 맥주를 원샷하다시피 해서 끝내고 화장실로 향했다. 접이문을 닫고 좌변기에 앉았다. 눈물이 쏟아졌다. 입에선 엉엉 소리가 내뱉어졌다. 왜. 왜. 눈물이 펑펑 입소리도 더 커져갔다. 밖에서 들릴까 두려워 물을 내렸다. 쏴. 쏴. 세면대 물을 틀어 세수를 했다. 종이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다. 좁은 기내 복도 길을 따라 걸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마르지 않은 눈물이 아직도 내 눈가에 서성거리는 것을 느꼈다. 지나가는 승무원에게 카스 하나만 더 주세요라고 말했다. 카스 한 모금. 또 한 모금. 목을 타고 넘어가는 카스 때문에 가슴이 더 시렸다.



불혹(不惑)


: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었음을 뜻한다. 공자가 40세에 이르러 직접 체험한 것으로, 《논어》〈위정편(爲政篇)〉에 언급된 내용이다. - [출처 : 두산백과]



*

황태포를 오물거리며 그녀가 말한다. “공자가 나이 40을 왜 불혹이라고 말했었는지 그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아. 보통 40이 되면 혹하지 않는다고 하잖아. 근데 그게 아니야. 생각해 봐. 인생에서 40대가 유혹이 가장 많을 시기야. 그 많은 유혹들을 조심하라는 의미로 그렇게 말한 거 같아. 그렇지 않아?”


그녀의 물음에 선뜻 대답할 수가 없다. 자칫하면 그녀에게 다시 매혹될 것만 같다. 나는 황태포를 듬뿍 손으로 집어 입 안에 넣는다. 입 안을 가득 채운 황태포 덕에 얻어낸 침묵으로 위기 아닌 위기를 모면하려 애쓴다.


그녀의 스마트폰 화면이 연신 반짝거린다. “괜찮아. 문자 봐도 돼.” “아니야. 나중에...”라고 말하며 내 눈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을 피할 수가 없다. 우리가 20년 전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나는 안다. 그런데도 이 눈빛을 거부할 수 없어 몸이 그녀 쪽으로 기운다. 몸이 기우니 목도 함께. 목 위의 머리와 입술이 함께. 그녀의 몸도 목도 머리와 입술도 기울어진다. 호프집 테이블 위에 커다란 삼각형이 주홍빛 조명을 투과하지 못하고 검은색 그림자만 테이블 바닥으로 흔들리며 떨궈 놓는다. “나우야. 그만.” 그녀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서 말한다. 몸이 뒤로 움직이고, 목도 머리도 입술도 뒤로. 난 애꿎은 500CC 유리잔을 잠시 바라보다 왼 손으로 집어 벌컥 들이킨다.


*

불현듯 기억은 나를 초등학교 6학년 교실 안으로 데려간다. “오늘은 짝을 바꾸는 날이에요. 승현이, 미숙이 같이 앉아. 민우, 민서 같이 앉고, 나우, 미래 저기 앉으면 되고, 어디 보자 승우, 예지….” 책상에 앉자마자 미래가 연필로 나무책상 중앙에 선을 그으며 말했다. “이 선 넘어오면 다 내 거야. 절대 넘어오지 마.” 아무리 조심해도 가능할 리 없는 요구임에도 난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내 공책이 선을 넘었고, 난 공책을 미래에게 빼앗겼다. “깔깔깔. 이거 내 거다.” 다음날은 지우개가, 그다음 날은 연필이, 필통이. 미래와 짝이 되고 나서 내 가방 속 물건이 점점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빼앗겼다. 그래서였을까. 내 마음조차 선을 넘어버린 걸까. 그렇게 미래에게 빼앗긴 마음을 아직 돌려받지 못한 걸까.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미래와 헤어졌다. 나는 앞으로 영영 미래를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둔 일주일 전 독서실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여학생의 모습이 낯이 익었다. 미래였다. 6년 만에 우연한 만남이었다. 수능 시험이 끝나고 미래를 밖에서 만났다. 눈이 오는 날이었다. 미래와 함께 강 길을 따라 걸었다. “나랑 사귀자.” 눈송이를 닮은 커다랗고 하얀 머플러를 목부터 얼굴까지 감고 있어 크고 동그란 눈이 더욱 돋아 보이던 미래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진지한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싫어. 난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아.” 난 미래의 진지한 눈빛을 잠시 바라보다가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은 했었던 일에 대한 후회보다는 해보지 못했던 일에 대한 후회를 더 많이 하는 법 이래. 우리 사귀자.” 함박눈이 내렸다. 미래는 자신의 왼손을 들더니 빨간 털장갑을 벗고, 내 오른손을 잡았다. 오래전에 선을 넘은 내 마음이 이제는 미래에게 닿은 걸까. 미래의 마음도 선을 넘어 내게 온 것일까. 미래의 손은 따뜻했다.


【2부】에 계속


*이 글은 픽션이며 등장인물, 사건 등은 실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반야심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