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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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연애를 통해 첫 경험을 했다. 미래가 말한 열 명을 채우려면 앞으로 아홉 명과 더 만나야 했다. 그런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 걸 왜 하는지. 대체 뭐가 좋다는 건지. 두 번째, 세 번째 경험을 거치면서 조금씩 납득이 됐다. 이래서 하는구나. 그래 좋기는 하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 후 허탈감은 뿌연 담배 연기만을 더 갈망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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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후배는 저돌적이었다. 가슴골이 깊이 파인 옷을 즐겨 입었다. 과실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내게 다가와 “선배님. 밥 사주세요.”라며 몸을 꼬았다. 밥을 먹고 나자 산책을 하자며 내 팔을 잡아끌었다. 인적이 드문 공원 벤치에 앉아 담배를 입에 물려고 손을 입 쪽으로 가져가는데, “선배 오늘 나랑 자요.”라는 후배의 말에 손가락 사이에 끼어있던 담배 한 개비를 바닥에 떨궜다. ”나 여자친구 있어. “라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기도 남자친구가 있다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녀는 경험이 풍부했다. 난 그저 그녀가 시키는 데로 따라갈 뿐이었다.
“오빠. 키스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혀를 좀 더 부드럽게, 그렇지만 강하게 자극할 때도 있어야 해. 아니. 이렇게. 그렇게 말고. 마스터베이션을 자주 해야 해. 그래야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어.”
“넌 자주 해?”
“응. 일주일에 두세 번은 해야 기분이 한결 나아져.”
“그럼 손으로 해?”
“아니. 오이나 아니면 맥주병 같은 걸로 깨끗하게 손질해서.”
그녀는 자신의 욕망에 대해 솔직하고 거리낌이 없었다.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났고, 그 시간만큼 나는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몸이 가면 마음도 함께 가는 걸까. 그녀와 몸을 함께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마음도 자라났다.
어느 날 그녀의 자취방에 혼자 남아 무료한 시간을 보내게 됐다. 커다란 황갈색 나무책상 옆으로 같은 재질로 만든 책장이 함께 붙어 있었는데, 심심한 차에 책이라고 읽을 요량으로 책장을 뒤졌다. 그러다 우연히 그녀의 다이어리를 발견하고 읽게 됐다. 불알친구 진우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설마. 그 진우는 아니겠지.’
5월 23일. 진우 오빠가 새벽에 방문을 두드렸다. 약간 취한 것 같았는데, 일단 문을 열고 그를 맞았다. 벗은 몸은 내 생각보다 좋았는데, 잘하진 못했지만 뭐. 23일이면 나와 처음 관계를 맺은 22일에서 하루 밖에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속에서 불이 났다. 어떻게 꺼야 할지 모르는 큰 불이 타올랐다. “너. 진우랑 잤어?”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이나를 보자마자 타들어가는 속을 억누르고 또박또박 입을 움직여 말했다. “응. 그게 뭐. 근데 진우 오빠 잘 못하더라. 오빠가 더 잘하는 거 같아.” 차분하다 못해 담담한 그녀의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내가 너무 고리타분한 사람인 건가. Y2K문화는 이런 건가. 그래서 미래도 내게 열 명이라는 과제를 아무렇지 않게 내준 걸까. 화는 가라앉고, 의문이 떠올랐다.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잘못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어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난 사귀던 여자친구에게 결별을 통보하고, 그녀에게 고백했다. “이나야. 나랑 사귀자.” 이나는 잠시 시간을 달라고 하더니 며칠 후 나를 만나자고 했다. “나 남자친구랑 헤어졌어. 이제 오빠만 만날 거야.”라며 내 가슴에 안겨 펑펑 우는 이나를 보니 진우와의 일은 마음속에서 지워야지 하며 다짐하게 됐다.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는. 이렇게 내 두 번째 연애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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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랑 사귄다며? 잘해봐라.”라며 말을 건네는 진우에게 “고맙다.”라며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그의 모습에서 어떤 흔적 같은 것을 찾으려는 듯 내 눈은 매섭게 그를 향했다. “나우야. 나 수업 있다. 나중에 술 한 잔 하자.”하며 진우는 자리를 피했다.
그 후 진우와 예전처럼 만났고 술을 마셨고 인생을 하소연했다. 그러나 진우도 나도 이나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나와 사귀기로 결정한 날 이후 이나는 갑자기 현모양처처럼 굴기 시작했다. 새벽에 김밥을 말았고, 저녁에 두부조림을 만들었고, 수업이 없는 날엔 잡채와 김치찌개를 끓였다. 외향적인 성격의 이나는 동아리 활동에 적극적이었는데, 그것도 내 일정에 맞춰서 가기도 하고 가지 않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생긴 의구심은 내 마음을 종종 뒤흔들었다. 이나가 문자에 답장을 하지 않았던 어느 날 새벽 불쑥 이나의 자취방 앞을 서성였다. 불이 꺼져있었다. 나 몰래 또 다른 놈이랑 자는 걸까. 불쑥 문을 박차고 들어가 볼까. 이나가 분명 본가에 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이나가 동기들과 과행사를 마치고 술자리를 간다고 했다. 겉으로 “잘 다녀와.”라며 쿨한 척을 하고 나서 불쑥불쑥 속이 뒤집혔다. 동기 남자애들과 또 몰래 자는 건 아닐까. 이나가 나 없는 술자리를 참가할 때마다 마음엔 불이 붙었다. 내장이, 심장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시간들이 종종이었다. 물론 이나는 나를 만나는 동안 단 한 번도 다른 남자를 만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난 그녀를 만나는 동안 단 한순간도 믿지 않았다.
이나가 방학을 맞아 오래전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 살고 있는 둘째 이모를 만나러 간다고 했다. 삼주 정도 머물다 방학이 끝나기 일주일 전엔 돌아온다고.
【6부】에 계속
*이 글은 픽션이며 인물, 사건 등 실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